[소소한 제주 이야기] 바쁜 세상에 굳이 한 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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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제주 이야기] 바쁜 세상에 굳이 한 달을
  • 2019.04.17 13:14
  • by 최윤정

제주의 4월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유채꽃은 형광 노란빛을 뿜는다. 새로이 돋은 나뭇잎은 연한 초록빛이 맨질맨질 감돈다. 청보리는 바람에 파도처럼 일렁이며 서서히 녹색에서 황금빛으로 변해간다. 도처에 피어난 아름다움으로 제주의 4월은 여행객들을 끊임없이 불러 모은다.

 

그런데, 여행 일정들을 보면 대개 2박이나 3박이다. 일주일살기/한달살기의 유행으로 예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길게 여행을 계획하지만 아직 꽃구경은 2, 3일이면 충분하다고 여긴다. 우리는 심심치 않게 이런 말들을 하거나 듣곤 한다. '제주는 4일이면 다 봐' 라던가 '제주에 3번 왔더니 이미 다 가봤어' 라고. 몇 천 년의 시간과 역사를 지닌 땅, 서울보다 3배가 넓은 섬, 한때 탐라국 이었던 이 곳을 '4일이면 다 보고 3번 만에 다 가보는' 그런 능력은 있을 수 없다.

 

여행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아름다운 자연, 특이한 문화, 다른 언어와 삶의 양태를 지닌 사람들 등. 그리고 자연, 문화, 사람들이 어우러져 고유한 지역색과 분위기를 낸다. 여행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특정한 지역에서 아주 작은 일부만 보았던' 자연이 남을 뿐이다. 조금 더 머물며 현지의 작은 식당, 지역 시장, 읍내의 목욕탕을 다녀보면 더 많은 정보와 경험이 모아지고 어느 순간 의문점도 퍼즐처럼 맞춰진다. 앞선 경험과 뒤의 경험이 서로 검증되거나 재배열되면서 풍부한 지역 정보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살아보는 방식의 여행이 주는 효과다.

 

함덕 서우봉. 바다를 따라, 길을 따라, 돌담을 따라 유채꽃이 만발이다. 대개 사람들은 꽃이 절정일 때를 노려 여행하지만, 한달살기를 하면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을 보며 긴 호흡으로 봄을 느낀다.

 

한달살기 여행의 장점과 즐거움에 대해 설명을 하면 '2주 정도도 충분하지 않은가', '대한민국 직장인들이 한 달을 휴가 낼 수 있는가'란 질문을 받는다. 물론 여행은 각자의 상황을 고려해야 하며, 여행의 목표나 즐기는 방식도 다양하다. 즉, 전적으로 여행자의 몫이며, 한 지역을 넉넉한 느낌이 들게, 조급하지 않게 여행하는 기간 또한 모두 다를 것이다. 한달살기가 부각된 것은 한 달이란 시간이 주는 두둑함과 실제 효용, 일주일/한달/일년살기처럼 딱 떨어지는 어떤 완결성 때문일 것이다. 일주일살기는 한 지역의 월, 화, 수, 목, 금, 토, 일요일의 미묘하게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 한달살기는 한 지역에서 1주씩 4번의 반복을 통해 여행지가 생활의 공간이 되는 경험을 해볼 수 있는 최소 단위다. 일년살기는 그야말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겪어보는 방식이며, 태어난 고향이나 현재 거주지 외에 본인에게 또 다른 고향을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면 아직 엄두가 나지 않는 한 달짜리 휴가는 어쩌나. 직장생활을 10년 정도 하면 대개 연차 개수가 20개 정도 된다. 일단 연차 개수만으론 한 달을 휴가 낼 수 있는 조건이 되는데 아직 사회통념상 한 달 동안 자리를 비운다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주 5일 근무가 보편화된 것처럼 일 년에 한 달 정도 휴가를 내는 것도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보편화될 일이라고 본다. 유럽에서는 이미 한 달씩 휴가를 내는 패턴이고 연말과 연초를 이어 아예 회사 전체가 한 달 정도 문을 닫기도 한다. 또한, 3년이나 5년에 한 번씩 제공하는 안식월 제도도 점차 자리잡고 있다. 자영업자들은 비수기에, 이직자들은 퇴사와 입사 사이 시간을 마련하여 한달살기를 추진한다. 회사와 협의하여 2주간은 이메일, 화상회의 등으로 원격 업무를 보고 나머지 2주는 장거리 여행을 하며 제주에서 한 달을 지내는 직장인도 보았다.

 

봄에 종종 나타나는 서귀포 혁신도시의 자욱하고 짙은 안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고 곧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습기를 꽉 머금고 있다. 이런 미묘한 날씨나 상황은 며칠짜리 여행으로는 경험하기 어렵다.

 

문제는 여건이 아니라 결심과 마음가짐이다. 한달살기를 할 수 있도록 주변의 여건을 조정하고 협상하고 기간을 잡아 구체적인 계획으로 만들어야 한다. 자녀가 있다면 학교나 어린이집을 결석시킬 용기를 내야 한다. 한 달 동안 낯선 곳에서 새로운 기분으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준비부터 실행하는 동안 낯선 상황에 놓인 나의 모습과 행동을 보며 그간 잘 드러나지 않았던 숨겨진 나를 발견할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라면 익숙했던 집을 떠났으니 불편하고 어색한 순간들이 찾아올 것이다. 이것을 재미있는 모험으로 여기고 게임을 하는 것처럼 즐겁게 지낼지, 내내 좌충우돌 하다 심정만 상해서 돌아갈지는 각자의 몫이다.

 

'바쁜 세상에 굳이 한 달씩이나' 라고 생각한다면 지금의 짧은 여행 패턴을 유지하면 된다. 추진하고 싶은데 불가능한 일로만 느껴졌다면 나와 비슷한 처지의 직장인, 자녀가 있는 가정들도 이미 어떻게든 경험하고 몇 년에 한 번씩 정례화하여 누리고 있다는 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이직 기간 중 여러 여행과 직업적 공백기간을 경험한 나에게 친구가 물었다. 한창 바쁘게 일 할 나이에 너무 노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대답했다. 은퇴하고 놀기보다 지금 노는 것이 내 인생에 훨씬 도움이 된다고. 놀면서 경험했던 것은 다음 직업에, 다음 하고 싶은 일에 영향을 끼쳤다. 인생 전체가 고르게 즐겁도록 우리는 신경을 써야 한다. 낯설고 즐거운 경험을 통해 중년, 장년, 노년에 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가는 시간도 배분해야 한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다음 방향을 잡을 시간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우리 사회에선. 은퇴 후의 무한정한 시간을 꿈꾸기보다 지금의 여건에서 틈과 틈, 한 달을 만들어보자.

 

 

최윤정
제주에서 1년간 집중적으로 올레길과 오름으로 소일을 했다. 많이 걷고 많이 오르면 몸과 마음의 군살과 기름기가 쏙 빠져 가뿐하고 담백한 삶을 영위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다. 지금은 아예 제주로 입도하여 일하며 놀며 제멋대로 산지 3년 차에 접어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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