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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제주 이야기] 노지 소주를 아시나요

노지(露地). 이슬 ‘로(露)’에 땅 ‘지(地)’를 사용한 한자어로 이슬을 맞으며 땅에 있는 상태, 국어사전에서는 ‘지붕이나 벽 따위로 가리지 않은 자리’라고 풀이한다. ‘노지’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나 더듬어 보면 ‘노지 시금치’란 말을 들어본 것 같고, 제주에선 ‘시설 감귤, 하우스 감귤’에 대비되는 말로 ‘노지 감귤’을 흔히 사용한다. 아마도 노지 소주는 노지 감귤에서 비롯되었지 싶다.

 

그렇다, 제주에는 노지 소주가 있다. 냉장고가 아닌 곳에 ‘일부러 상온 보관한 소주’를 의미하며 제주의 식당과 술집에는 기본으로 준비되어 있다. 아마 눈썰미가 좋은 사람들은 반찬을 준비하는 싱크대 아래칸이나 식당 한 켠에 가지런히 줄을 세워둔 상당한 양의 소주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냉장고가 꽉 차서 그리 둔 것이 아니라 상온 보관하는 것이다. 주로 제주 지역 소주인 투명한 병의 ‘한ㅇ산’, 한ㅇ산보다 낮은 도수의 ‘한ㅇ산 올래’, 그리고 육지 대표 소주 격인 ‘참ㅇ슬’이다.

 

입지와 주요 고객에 따라 노지 소주 주문비율이 다르다. 조천리의 돼지국밥집은 연배가 있는 도민들은 대개 노지 소주를 찾는다고 한다. 함덕의 감자탕집은 30%정도가 노지 소주 비율이라고 알려줬다.

 

이런 특성으로 제주에서 소주를 주문하려면 2가지를 말해야 한다. 주종과 노지 여부에 대해서 말이다. 이미 손님만 봐도 파악이 되는 노련한 주인장들은 눈치껏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요즘은 도민들이 ‘시원한 참ㅇ슬’을, 여행객들이 ‘노지 한ㅇ산’을 선호하는 등 ‘개취(개인의 취향)’가 천차만별이라 약간의 신중을 기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양식당의 스테이크 주문처럼 ‘고기 익힘’에 관한 질문 매뉴얼이 있어 또박또박 주문을 구체화하는 것도 아니다. 손님이 어떤 술을 원할지 주인장이 헷갈릴 때는 노지 여부의 정보가 이어 나올 것을 기다리며, 즉각 서빙을 하지 않고 뜸을 들이거나 말 없이 냉장고를 손으로 가리켜 냉장 소주인지를 추가 확인한다.

 

나는 대체로 여행객이 많은 시내권에 살았고 지인들도 이주민인지라 노지 소주가 얼마나 보편적인 제주의 술 문화인지는 체감하지 못했었다. 식당 한 켠에 노지 소주가 많은 걸 보며 찾는 손님들이 많은가 보다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다 제주 서남쪽 저지리의 식당에서였다. 마땅한 식당이 없어 피하고 싶었던 말고기 메뉴가 반 이상인 식당에 들어갔는데 점심시간을 제대로 맞췄는지 이미 많은 테이블이 차있었다. 나는 구석 테이블에 앉아 그야말로 진풍경을 보았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말내장탕을 먹고 있었고 말내장탕을 주문했다. 그리고, 말로만 들었던 ‘소주 주문의 정석’인 ‘하얀 거(투명한 병의 한ㅇ산) 줍서’라는 외침에 주인장이 냉장고가 아닌 선반에서 날쌔게 한ㅇ산 소주를 채서 테이블에 가져다 주는 모습이 연신 벌어졌다. ‘말내장탕’, ‘하얀 거’, ‘제주어’가 가득한 식당이었다. 그 와중에 외따로이 육개장을 주문한 나는 말내장탕의 홍수 속에서 나의 육개장에도 그 육수가 섞여 있을 것만 같아 몇 숟가락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점심특선인 말내장탕, 손님과 주인 모두 당연하게 여기는 노지 한ㅇ산, 게다가 원어민 수준의 제주어까지 후각, 시각, 청각이 버무려진 특별한 경험이었다.

 

노지 소주는 주로 도민들이, 그 중에서도 연배가 있는 분들이 찾는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유를 여쭤도 소주는 원래 그렇게 먹는 거지 뭘 따지냐는 반응들이라 이리 저리 짐작만 해볼 따름이다. 소주는 원래 상온으로 마셔야 더 진하게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는 의견, 과도한 냉장은 차갑기만 할 뿐 따뜻한 음식과는 어울리지 않아 배앓이를 할 공산이 크다는 의견, 제주의 식문화가 돼지 우린 물과 돼지고기류인데 돼지의 찬 성질을 보완하게끔 미지근한 노지 소주를 선호한다는 의견 등이 있다. 암튼, 노지 소주를 선택하는 이들에게 식도를 타고 흐르는 짜르르한 차가운 술맛은 별로라는 것이다.

 

그럼, 입도 3년차는 뭘 마시냐고요? 시원한 ‘한ㅇ산 올래’를 좋아한다. 입도 초기에는 투명한 유리병에 양각으로 도드라진 산 모양이 예뻐서 한ㅇ산 하얀 병을 마셨다. 그리고 ‘한ㅇ산 주세요’라는 말도 좋았다. ‘한ㅇ산’이라는 제주 상징성과 청량한 이미지가 주문 후 마법처럼 입에서 맴돌았기 때문이다. (주류 브랜드에 산 이름을 고려해볼 만하다. 시름, 쩨쩨, 쭈굴의 기운이 가득한 술자리에 산 이름이 주는 기개와 정서가 상당한 위로가 된다. ‘이슬’을 마시는 것과 ‘산’을 마시는 것의 차이라고나 할까.) 

 

한ㅇ산 소주병에 담긴 오일장의 각종 기름들. 초록색을 탈피한 투명한 병과 양각된 산 모양이 예뻐 마음이 홀렸다.

 

그러나, 서울에서도 참ㅇ슬 후레쉬를 마셨던 바 내 취향은 저도주인 17.5도의 한ㅇ산 올래다. “올래 시원한 거 주세요”라고 말하면 된다. 가끔 ‘올래’만 말하면 주인장이 지긋이 쳐다볼 때가 있다. ‘설마 노지 소주를 마실 것 같은 구력 높은 주당으로 보이는 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며 “시원한 걸로 주세요”라고 덧붙인다. 그럼, 그 잠시간이 머쓱했던지 주인장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냉장고 문을 벌컥 열어 시원한 소주를 가져다 준다. 술이 좋아서 마시는 게 아니라 사람이 좋아서 마신다는 뻔한 말이 있다. 나도 한ㅇ산이 좋아서 마시는 게 아니라 제주를 알고 싶어 마시는 거라 뻔하게 말해보겠다. 오늘은 간만에 한ㅇ산 하얀 병이 당긴다.

 

어느 회식의 잔해. 한ㅇ산 오리지널이 21도, 한ㅇ산 올래는 17.5도로 저도주 유행은 제주도 마찬가지다.

 

 

최윤정
제주에서 1년간 집중적으로 올레길과 오름으로 소일을 했다. 많이 걷고 많이 오르면 몸과 마음의 군살과 기름기가 쏙 빠져 가뿐하고 담백한 삶을 영위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다. 지금은 아예 제주로 입도하여 일하며 놀며 제멋대로 산지 3년 차에 접어 들고 있다.

 

 

최윤정  webmaster@lifei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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