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사람들의 시간과 삶은 ‘고무줄’이 아니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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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들의 시간과 삶은 ‘고무줄’이 아니야 !
[라이프인ㆍ생명안전시민넷 공동기획_안전칼럼]나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 2018.12.10 16:32
  • by 나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어렸을 적, 아직 스마트폰이 도입되기 전에 친구들과 즐겨 했던 놀이 중 하나가 바로 고무줄 놀이다. 한 줄에 몇 백원도 하지 않는 까만색의 고무줄을 사다가 친구들과 편을 나눠 양 쪽에서 줄을 잡고 있으면, 선수 한 명이 등장해 노래를 부르며 자유자재로 고무줄을 갖고 놀았다. 친구가 다리를 하늘을 향해 힘껏 뻗어 올리면 쭉 늘어나고, 다리를 내리면 금세 줄어들었다. 그러다 줄에 걸리면 게임은 끝. 이내 고무줄은 다른 친구에게 넘어가 다시 게임이 시작된다. 이렇게 어렸을 적 즐거웠던 추억을 소환하는 고무줄이 노동자의 노동시간과 삶에 대입되어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줄었다, 늘었다 한다면? 풍경은 전혀 달라진다.

노동자에게 나쁜 고무줄 노동시간제, ‘탄력근로제’ 
탄력근로제는 특정 일·주에 법정근로시간을 초과해 노동을 가능하게 하며, 초과 노동시간에 대한 가산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제도이다. 선택적 근로시간제, 간주근로시간제, 재량 근로시간제 등 ‘유연 근로시간제’ 중 하나이다. 근로기준법 51조에 따라 노동시간을 특정 기간에 줄이고 늘리는 대신 총 노동시간의 평균을 법정근로시간 주 52시간 이내로 맞추면 된다. 노사합의에 따라 2주에서 최대 3개월까지 허용 가능하고, 사용자는 6주 연속 최대 주 64시간(주 52시간+연장 12시간)을 근무시킬 수 있다. 게다가 초과 노동시간에 대한 가산수당도 합법적으로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즉, 제한 없는 하루 노동, 무료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고무줄 노동시간제’가 바로 탄력근로제인 것이다.

이미 현행법상으로도 노동시간을 탄력적 운용할 수 있음에도 정부는 자본의 요구를 적극 수용해 단위기간을 6개월에서 1년까지 연내에 확대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론상 6개월 동안 최대 주 64시간 노동이 가능해진다. 노동자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은 더 멀어지고 대신 ‘과로가 일상인 삶’으로 바뀔 우려가 크다.

탄력근로제는 어떻게 노동자의 건강과 삶을 망가뜨리나 
한국의 노동자는 이미 오랫동안 장시간 일해왔다. 48년 전 11월 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피복공장 노동자 전태일이 온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이며 외친 말이 바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였다.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 저임금이라는 굴레에 속박됐다. 자본은 노동자에게 이윤창출을 위해 더 긴 시간 저임금으로 일 할 것을 강제했다. 전태일이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근무 환경, 임금 문제 등을 조사한 내용을 보면 10대 청소년조차 학교에 가지 못하고 일당 70원을 겨우 받으며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쉬지 못하며 하루 14시간을 종일 일해야만 했다. 

1953년에 도입된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노동시간은 1일 8시간, 1주 48시간이었다. 법에서 정한 노동시간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불과 50여 년 전의 일이다. 법정근로시간 주 40시간제는 2003년이 되어서야 입법화됐다. 우리나라의 노동시간 단축 역사를 돌아보면 노동자의 고통에 비해 노동시간 제한은 얼마나 더디게 이뤄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2018년 현재 노동자들의 삶은 얼마나 긍정적으로 변화했을까? 안타깝게도 한국은 OECD 평균보다 33일을 더 일한다는 통계(17년 기준 한국 2024시간, OECD 평균 1759시간)가 있을 정도로 장시간 노동 국가의 대명사이다. 제4차 근로환경조사를 분석해본 결과로도 임금노동자 18.4%가 한 달 10일 이상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통계로 확인하지 않더라도 저녁 6시 이후에도 불이 켜진 빌딩을 심심치 않게 살펴볼 수 있다.

당연히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의 몸과 삶에 좋지 않다. 여러 연구를 통해 일·주당 노동시간 증가가 피로 증가, 집중력 저하, 면역력 저하, 수면장애 등 각종 건강 악영향이 확인됐다. 하루만 밤을 꼴딱 새우면 다음날이 힘들어진 경험은 많은 이들이 해봤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사회적 관계를 망가뜨리고, 자율성까지 침해한다. 탄력근로제는 노동자의 필요, 욕구, 선택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적극적 필요에 의해 수용되고 있다. 노동자의 의사가 아닌 기업이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만큼 일하도록 강제한다. 그렇게 자본의 기획 아래 짜인 노동시간은 노동자의 일상조차 좀먹는다.

죽는 노동자도 많다. 산재 승인 노동자 통계만으로도 한해 약 310명의 노동자가 과로 때문에 사망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낮은 승인율을 감안한다면 승인되지 않은 과로사 노동자는 더욱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고용노동부는 주 평균 60시간 이상 일하다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사망한 노동자에게 ‘과로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확대하여 주 최대 64시간, 개정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은 중소규모 사업장의 경우 최대 80시간(주5 2시간+휴일 16시간+연장 12시간)까지 확대하려 한다. 그럼에도 정부는 업무생산성 향상 및 기업 경쟁력 제고를 근거로 노동시간 단축 효과를 발생시키지 않으면서 장시간 노동에 임금 삭감까지 세트로 노동자의 목숨과 맞바꾸려 하고 있다.

하루 노동시간 제한부터 시작해야 
노동자의 건강과 삶을 위해선 무한 폭주하고 있는 탄력근로제 확대를 당장 멈춰야 한다. 또한 노동시간 단축은 하루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 달, 한 주 단위 기준으로만 노동시간이 논의된다면 탄력근로제처럼 하루 노동시간 제한 없이 무제한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구멍이 생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하루 8시간, 주 40시간제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수면에 가라앉아 이야기되지 않고 있는 교대제-심야노동 제한, 특례제도 폐지가 노동시간 단축의 주요 요구로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이 제도들 역시 장시간 노동을 부추기는 주요 요인 중에 하나이다. 또한 근로기준법 사각지대에 있는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 감시·단속적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등에 대한 차별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 필요하다. 더불어 제대로 쉴 수 있는 휴식권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탄력근로제 확대 중단과 노동시간 단축 요구는 절대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바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일 뿐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시간의 ‘회복’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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