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1/3쯤 지나는 중반에서는 흥과 에너지가 조금씩 가라앉고 두 발이 알아서 그저 걷는다. 풍광도 비슷하게 느껴지다 보니 외부를 두리번거리기 보다 이런 저런 사념들이 많아진다. 나는 좋았던 일, 자랑스러운 일보다 의도치 않게 꼬였던 일, 부끄러웠던 일이 많이 생각났고, 상처를 주고 받았던 사람들이 난데없이 떠오르기도 했다. 예전 일들을 천천히 복기해 보거나 그때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걷기의 후반. 머릿속을 한바탕 헤집어서 그런지 길의 후반은 주로 먹는 생각을 한다. 집에 가서 수육을 해먹을까, 식당에서 삼겹살을 구울까, 술은 막걸리를 마실까, 소주를 마실까, 시원한 물김치 먹고 싶다, 물김치는 엄마가 잘 하는데, 김치 좀 사서 살까 등등. 28개의 길을 걷는 동안 대개 이런 패턴이었다. 자연 무식자의 탄성과 호기심, 주로 창피한 사건들에 관한 잡념들, 이 길의 끝에서 무엇을 먹을 지로 심사숙고 하는 시간들이었다. 평소 사색과 성찰을 일삼지 않는데 걷기가 뭐 대수라고 대단한 구상과 깨달음이 샘솟겠는가, 그저 걷는 동안 나에게 온 잡념들과 욕구에 반응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하는 기도와 두 발로 추구하는 선(禪)은 이렇게나 평범하고 소소하다.
제주올레의 베스트 코스는 어디인가요, 이런 질문은 난감하다. 올레길 뿐 아니라 뭐든 그 중에 제일인 것을 골라라 하는 것이 의미 없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개는 길들 모두 나름의 풍광, 의미, 매력이 있어서 어느 길이 최고라 말하기 어렵다고 고집스럽게 대답한다. 실제로 길을 걷는 이의 취향, 걸을 당시에 처한 상황, 함께 걷는 이들에 따라 감동과 만족도는 가감될 수 있고, 남들에겐 그저 그런 길이 내게는 비범한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추천을 원하는 경우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꼽는 5코스 남원-쇠소깍, 7코스 서귀포-월평 올레길을 말해주곤 한다. 걷는 이의 취향을 알 경우는 조금 더 구체적이고 색다른 코스를 소개한다. 하지만 여전히 대답하기 어정쩡한 질문이다.
걷기는 봄과 가을이 제격이다. 올해 여름은 이상고온으로 길을 나서기가 어려웠다. 겨울은 억센 바람이 걷는 이의 귀싸대기를 때린다. 가을은 청명한 하늘과 흔들거리는 억새가 곳곳에서 동행이 되어준다. 걷기의 효능이나 제일 좋은 길을 알아내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을 뿐 더러 뾰족한 답도 없다. 그러니 일단 걸어보자. 걷다 보면 스스로에게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을 것이다. 또, 나만의 좋은 길들을 우연히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들을 미주알고주알 말하는 것보다 ‘그냥 걸었어’, ‘잘 모르겠어’로 에둘러 대답하고 싶어질 것이다. 어서 걷자, 가을이 얼마 안 남았다.
최윤정
제주에서 1년간 집중적으로 올레길과 오름으로 소일을 했다. 많이 걷고 많이 오르면 몸과 마음의 군살과 기름기가 쏙 빠져 가뿐하고 담백한 삶을 영위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다. 지금은 아예 제주로 입도하여 일하며 놀며 제멋대로 산지 3년 차에 접어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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