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구하기를 벗어나 청소년과 연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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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구하기를 벗어나 청소년과 연대하기
[라이프인ㆍ생명안전시민넷 공동기획_안전칼럼] 림보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활동가)
  • 2018.08.13 11:10
  • by 림보


비슷한 애도 : 세월호와 직업계고 산업체 파견 현장실습

세월호에서 희생된 다수의 청소년 피해자, 단원고 학생들의 죽음을 마주한 사회는 탄식하고, 안타까움과 열패감에 젖어 마음 아파했다. 물론 세월호 이전에도 수많은 참사가 있었다. 416 세월호 참사 작가기록단이 작년에 출간한 ‘재난을 묻다’에 다시 기억하고 기록한 재난 참사 사건의 목록을 살펴봐도 자세한 내막을 기억조차 못하는 사건이 많다. 그 책도 7건의 사건을 힘겹게 추려 정리한 것일 테다.

지난 4년간 끈질기게 이어온 유족들의 싸움이 재난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지만, 참사 발생 직후 세월호를 둘러싼 애도의 물결에 대한 우려가 있었음을 다시 떠올려 본다. ‘어른들만 믿고 기다린 순진한 바보’ 또는 두려움에 떨다가 죽음을 피하지 못한 ‘무기력한 피해자’의 이미지로 회자되었던 세월호의 수많은 청소년 희생자들과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던 많은 시민들의 애도. 시민들은 청소년 희생자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어른 혹은 부모의 자리에 서 있었다.

사실 이런 애도의 모습은 직업계고 산업체 파견 현장실습으로 사망한 청소년 노동자를 애도할 때도 유사하다. 2011년부터 시작된 산업체 파견 현장실습 노동자의 죽음을 ‘꽃다운 0군/양(아이)의 죽음’으로 부르며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하는 언론이나 사람들의 반응을 쉽게 볼 수 있다. 무관심한 것보다는 괜찮은 것 아니냐고 묻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왜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다른 노동자의 수많은 죽음보다 유독 ‘그 어린 노동자의’ 죽음이 안타깝고 가슴 아픈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목숨을 잃었던 그 노동 현장, 비슷한 처지에 내몰려 유명을 달리한 다른 노동자가 있었다.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사망한 현장실습 노동자 A 씨의 사고 이전인 2012년과 2013년, 성수역에서 스크린도어와 방음벽 작업을 하던 노동자들이 사망했고, 2015년 8월 2호선 강남역에서도 사고가 있었다. 2017년 1월 콜센터 해지 방어부서에서 일하다 사망한 현장실습 노동자 B 씨의 일터에도 몇 년 전 아주 유사한 이유로 죽음을 선택한 노동자가 있었다. 그 이전의 죽음보다 현장실습 사망 노동자의 죽음이 조금이나마 더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이 죽음들은 ‘사건’이 될 수 있었을까.
 


'청소년 구하기'는 청소년이 스스로 주체가 될 기회마저 빼앗는다

작년 <산업체 파견 현장실습 중단과 청소년 노동인권 실현 대책회의>의 활동을 하면서 현장실습생 사망사고에 쏠린 공감과 관심은 물론 힘이 되었다. 백여 개의 연대단체가 함께 하는 집회며 공동기자회견, 문화제 등 하는 활동마다 전에 없이 든든했다. 그러나 여전히 실습생이나 아르바이트 노동자로 일하는 산업체와 사업장에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위험천만한 노동조건을 견디며 일하는 청소년을 구조하자는 호소로만 공감이 확산하는 것에 대해서는 늘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하는 청소년-아르바이트 노동자든, 현장실습 노동자든-의 현실을 얘기하면 ‘아니 어떻게 어린 청소년을 이렇게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내몰 수 있나. 우리가 나서야 한다.’며 비청소년 시민, 활동가는 쉽게 분노하곤 한다. 그 분노 앞에서 여전히 당황하지만, 그 당황스러움은 어른인 시민과 활동가에게 잘 가닿지 못하는 듯도 하다. 창창한 앞길을 다 살아보지 못한 청소년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죽은 이의 나이가 어리면 서슴없이 반말하며 ‘너’라고 부르는 사회에서, 청소년은 안전과 생명의 권리를 침해당한 피해자의 위치를 벗어날 수 있을까. 다른 이의 구조나 도움이 필요한 피해자는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는 권리주체가 되기 어렵다.

나이가 어린 노동자에게만 유난히 열악한 노동조건이나 야간 노동이 문제인 것이 아니다. 노동자라면 누구라도 그런 환경에서 일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일하는 청소년의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것은 청소년을 구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이없는 노동조건을 강요하는 구조 안에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더욱 강도 높은 배제와 차별을 마주하는 청소년 노동자들과 함께 맞서 싸우고 연대하기 위함이다.

큰 희생이 없더라도 사소한 것은 아니다

한편 일하다 다친 이들은 어떤가. 그 가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겠지만, 웬만한 피해가 아니면 산재신청을 비롯한 권리구제 절차를 밟지 않는 경우가 많다. 상해를 입은 당사자가 알아서 치료비를 내거나 아주 드물게 회사가 일정의 치료비를 지불하는 것이다. 다친 이는 오롯이 가족이 돌보는 현실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직업계고와 전문대의 산업체 파견 현장실습, 병역특례 등의 사업체에서 다치거나 성폭력, 일터 괴롭힘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너무도 많지만, 일하던 사업체를 옮기거나 그만 두기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어렵다.

사고가 아닌 일상적인 폭력과 차별의 경우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해친다. 특히나 청소년이고 또 노동자인 ‘일하는 청소년’이 겪는 차별과 폭력은 더 그렇다. 일하는 청소년들은 나이가 어리다고 일터에서 경험하는 모욕을 떠올리며 “어른들에게 대하는 것처럼 대해주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 모욕과 차별이 죽음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사소한 문제로 넘어가도 좋은가.

일하는 청소년이 아니더라도 청소년 대부분이 일터와 학교와 가정에서 존엄을 훼손하는 억압과 폭력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다. 그런데도 다수의 희생이 없으면, 웬만큼 충격적인 사고가 아니면 언론도 외면하여 뉴스가 되지 못하며, 피해를 겪은 생존자 역시 말할 수 없다. 들어주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청소년 피해 생존자들은 사회가 마련해준 대책을 잘 수용하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도 고민스럽다. 자신 앞의 위험을 어떻게 해결하고자 하는지 피해생존자가 원하는 게 뭔지 궁금해 해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폭력적인 가정을 탈출한 청소년에게 집으로 돌아가거나 쉼터에 머물라고 강요하기보다는 지금 원하는 게 뭔지, 필요한 게 뭔지 물어야 한다.

청소년 시민의 생각/의견을 궁금해 하는 사회

세월호 사건이 터지자 생존수영을 교육하겠다는 발상처럼, 일터에서 곤란을 겪는 청소년들의 경험을 다루는 방식도 유사하다. 마치 청소년들이 노동자로서 누릴 수 있도록 법이 보장한 권리를 모르는 미숙한 존재이므로 문제가 커진 것이라는 식의 논의는 ‘가르치면 되겠구나. 교육을 시키자.’로 손쉽게 끝나고 만다. 그러나 자기 의견을 말하는 족족 말대꾸나 하는 어린 것이 되기 일쑤인, 자기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어떤 행동도 용납하지 않는 가정과 학교 생활 속에서 청소년들에게 노동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권리를 교육하면 정말 사회가 할 바를 다 했다고 안심해도 좋은 것일까.

안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청소년에게 노동인권교육을 한 시간 더 시키는 것 보다 청소년의 의견을 말할 때 잘 들어주고, 존중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인권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종요할 것이다. 문제 상황을 마주하고 해결하는 과정에 청소년이 직접 참여할 수 있다면 교육적 효과는 더욱 크다.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질문하고 요구할 기회, 위험한 노동과 과도한 경쟁을 거부할 권리를 경험하는 학교, 이를 위해 학생의 학교운영 참여를 보장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가르치는 것 말고 시도해볼 만한 일은 정말 많다.

국가가 피해자를 배려/보호하려는 것과 피해자를 권리 주체로 인식하고 충분히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다르다. 보호자를 자처하는 가부장적인 국가와 자본으로 대표되는 사회가 던지는 비난 - ‘네가 조심했어야지, 그런 일 없도록 신경 썼어야지, 하라는 대로 말을 들어야지.’ - 앞에서 청소년, 여성, 노동자의 안전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가 되어버린다.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통제하는 대로, 명령과 질서에 순응하고 잘 따를 의무다. 안전이 위협 당했을 때 특히 청소년, 여성, 노동자에게는 이 의무를 다하지 않은 개인의 책임을 따져 묻는다. 이런 식의 피해자 비난은 기본적으로 그 사람을 동료시민/주체적 인간으로 보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통제를 수용해야하는 존재로 여기기에 가능하다.

정부의 무감각과 무대책도 문제지만, 생명과 안전을 위협받은 여러 사건의 피해자가 무기력한 피해자의 자리를 벗어나 권리를 요구하는 주체로 나설 수 있으려면 전체 사회의 인식 역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 사회는 청소년이 생명과 안전을 위협받는 상황을 주체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잘 떠올리지 못한다. 게다가 청소년 시민이 그 위협을 어떻게 돌파하고 싶은지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목소리 없는 비시민으로 여겨지는 청소년 시민이 피해자가 될 때, 그들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요구가 과연 이 사회에 ‘위협’이라도 될 수 있으려면, 그 요구를 무마하기 위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공격’에 대해 대응할 기회라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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