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 한 사람이 책임지는 철저한 민주주의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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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한 사람이 책임지는 철저한 민주주의자로
공정경 기자가 만난 사람들 / 경남교육연구정보원 황선준 원장 인터뷰(5)
  • 2017.06.30 12:07
  • by 공정경
황선준 원장은 2016년에 한 학기 동안 초등학교에 방문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줬다. 아이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사회적 안전망과 노사 간 서로 상생하는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

공정경 기자(이하 공) : 스웨덴은 노동분쟁 예를 들어, 부당해고 같은 게 있나요?

황선준 원장(이하 황) : 지금 한국이 얘기하고 있는 동일직종 동일임금이 70년대 스웨덴의 노동정책이었어요. A라는 회사는 생산성이 높고 B라는 회사는 A 회사보다 생산성이 낮은데 임금을 똑같이 월 100만 원을 줘야 한다고 하면 A 회사는 이윤이 많이 남고 B 회사는 이윤이 적어서 부도가 날 수 있습니다. 부도가 나서 정리하든지 아니면 경영을 쇄신해서 생산성을 높이든지 해야죠. 그래서 동일직종 동일임금이 산업구조를 혁신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 기여를 많이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윤이 많은 기업은 노동기금 등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고요.

스웨덴은 복지가 잘 되어 있어서 오히려 정리해고가 우리나라보다 더 쉬울지 몰라요. 어느 기업이 도저히 기업의 상황이 어려워서 100명은 정리해고 해야 한다고 하면 노사협상을 통해 해고에 대한 보상금을 주며 해고를 합니다.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는 직장에서 나오는 혜택도 있지만 국가 차원에서의 보험(복지)가 잘돼 있어 실업수당으로 임금의 80%를 받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해고 노동자는 국가가 제공하는 재교육 또는 새로운 교육을 통해 다른 분야로의 전업이 가능합니다. 즉 국가가 쇠퇴하는 분야에서의 유휴 노동력을 전망이 좋은 신산업 분야로 유치한다고 보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적극적 노동정책이고 스웨덴 국가가 이런 큰 역할을 해 왔고 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스웨덴은 사민당이 오랫동안 집권한 나라입니다. 1932년 최초로 집권하고 오늘날까지 세 번 우파에게 정권을 빼앗겼습니다. 1976년~1982년, 1991년~1994년 그리고 2006년~2014년. 그러니 복지국가 스웨덴을 사민당이 세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사민당의 근간은 당연히 노동자죠. 복지를 확장한 1950-60년대의 정책은 노동조건을 개선하거나 여성(가정)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중요한 정책을 많이 개발했지요, 즉 노동자와 여성에게 좋은 정책과 복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잃어도 당장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상황은 아닙니다.

공 : 아. 그렇겠네요.

황 :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게요. 자동차 회사 볼보(VOLVO) 같은 경우에 2008년 금융위기로 경영 사정이 안 좋아져 어쩔 수 없이 2,900명을 정리해고 했습니다. 당시 노사가 머리를 모았습니다. 스웨덴 정부와 지자체가 개입해 재교육과 전직을 알선해 해고통지 1년 만에 2,635명이 전직했죠. 경영상황이 다시 좋아지자 볼보는 해고노동자를 우선 고용했습니다. 정리해고를 단행한 지 2년 만에 1,556명이 볼보로 복귀했습니다.

공 : 기업이 스스로요? 우리나라는 해고노동자 먼저 고용하라고 그렇게 요구해도 안 하는데...

황 : 왜냐면 그 기업에서 일하면서 노하우를 가진 사람들이잖아요. 재교육 할 필요 없이 바로 일할 수 있으니 당연히 우선 채용을 하죠. 또 의리가 있어야죠. 정리해고된 기간에는 국가가 책임을 지고요. 사회적 안전망이 잘 돼 있다고 보면 됩니다.

공 : 노조탄압은 없겠죠?

황 : 에이, 노동자 정권이 노동자를 탄압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그러나 나라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을 때는 노동자도 당연히 고통을 같이 나누죠.

공 : (웃음) 말이 안 되고.

황 : 1800년대 말 1910년대 스웨덴에서도 노사 간 대립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1938년에 나까(Nacka)지역의 휴양지인 살트쉐바드(Saltsjobad)에서 노동자 대표 (LO)와 사용자 대표 (SAF)가 대타협을 이뤄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살트쉐바드협약이고 노사 간 힘의 대결이 아니라 소통과 타협으로 노사 문제를 해결하는 ‘스웨덴 모델’입니다. 살트쉐바드협약은 한국에서 알고 있듯 노동자, 사용자 그리고 정부의 대표 간 협약이 아니고 노동자와 사용자 대표가 정부의 개입 없이 이뤄낸 협약입니다. 이 협약이 그 후 노사 간의 모든 협약의 근간이 되었고 1976년에야 비로소 일부 수정이 가해질 정도로 오랫동안 적용된 협약입니다.

이 협약은 크게 다음의 4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얘기하면 1) 노사 협력기구로 중앙에 노동시장위원회를 설치하여 노동시장에서의 갈등을 해결한다. 2) 노동자가 파업을 결정하거나 사용자가 공장을 닫는 직장폐쇄(lock out) 조치를 취하기 전에 지방과 중앙에서 노사가 타협한다. 3) 해고는 절차에 따라 하고 해고 시 노동자 측과 상의를 해야 하는 것으로 이 조항은 1974년의 법(LAS, 고용보호법)에 따라 폐지되었다. 4) ‘노동보호’에 해당하는 산업은 파업이나 직장폐쇄 등의 경제적 투쟁대책이나 사회적으로 위험한 갈등은 한계를 두어 보호한다. 이런 경우에는 노사 갈등 중에도 공장을 계속 가동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노동시장위원회가 사회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노사갈등을 중지시킨 적이 없습니다.

살트셰바드협약이 세계 제2차 대전 후 스웨덴의 경제성장과 복지사회의 건설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협약 이후 노사는 서로를 파트너로 인정하여 노동 갈등을 최소화하고 노동갈등이 일어났을 때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해냈습니다. 1946년부터 1968년까지 무려 23년간 사민당 출신 총리로 스웨덴을 이끈 타게 엘란데르는 격주로 목요일마다 재무장관 주재 하에 직군별 노사대표와 저녁을 함께 하며 노동현안에 대한 얘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공 : 스웨덴 노동조합조직률은 얼마나 되죠?

황 : 스웨덴의 노동조합조직률은 1995년 86%로 가장 높다가 2013년 기준으로 67.7%입니다. 노동조합에 따라 예를 들어 LO(불루칼라노조), TCO(사무원 노조), SACO(고학력자 노조)의 노조 가입률이 조금씩 다를 것입니다. 한국은 2016년 기준으로 10.2%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국가 중 노동조합조직률 최하위죠. 노동조합 가입자의 비율을 놓고 볼 때 스웨덴 노동조합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조직이며 노조의 전통이 확고합니다. 등 뒤에 과반이 넘는 수의 노동자가 있는 무시 못 할 조직이기 때문에 협상력을 갖고 사용자 측과 동등하게 논의를 풀어나갈 수 있는 겁니다.

노조가 이런 엄청난 세력인데 노조를 탄압한다고 해보세요. 그것도 사회민주당 정부가 노조를 탄압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을 때 사민당 정부가 실업수당 등을 삭감했고, 국가적인 고통을 다 같이 짊어지자는 공동체 정신이라 보면 되죠.

공 : 사무실 앞에 S-OIL 본사가 있어요. 며칠 전에도 S-OIL이 노조탄압 한다고 민주노총이랑 모여서 몇 차례 집회를 했거든요. 우리나라는 쌍용자동차, 유성기업, 방송국 노조 등 정말 수많은 노조탄압이 있습니다.

황 : 지금이라도 우리가 서로 상생하는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극단적으로 대치하며 싸워서 이익 보는 편은 한 편도 없지요. 물론 국가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치고요.

공 : 기업이 왜 이렇게 노조를 탄압하나 생각해보면... 기업 마인드가 노조 자체가 그냥 싫은가 봐요.

황 : 지금은 특히 실업률이 높아 유휴 노동력이 많으니까 사용자들이 노동자들은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하고 노동에 드는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죠. 그런데 사실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노동자들의 기술, 전문성, 충성심이에요. 이것이 노동생산성과 효율성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크고 중요하다는 걸 모든 연구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동의 질을 좀 더 생각하는 경영마인드가 필요하지요.
 

황선준 원장이 메고 다니는 빨간 배낭. 학교 현장 방문할 때도 항상 메고 다닌다.


책임지는 사회! 책임지는 사회가 돼야 비로소 사회적 신뢰도 생겨 

공 : 알겠습니다. 노조탄압이 스웨덴의 1800년대 1900년대 초 현상이라니... 스웨덴은 노동현장에서 안전사고 같은 게 없나요?

황 : 안전사고가 전혀 없는 곳은 없습니다. 문제는 사고가 났을 때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중요하죠. 스웨덴은 아마도 산재처리가 잘 되어 있어 노동안전이 보장된다고 봐야죠. 우리나라는 직장에서의 사고가 참 많지요. 일 년에 2,400명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사망하고,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대구지하철 화재, 세월호 참사 등 계속 사고가 나잖아요. 어떻게 이렇게 계속 사고가 나는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문제는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지는지? 분야별로 위치별로 각자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과연 책임을 지는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역으로 또 우리가 하도 ‘안전, 안전’ 부르짖다 보니까 애들이 밖에서 제대로 놀지도 못하는 것 같아요. 스웨덴 학교 가 보세요. 겨울에는 꽁꽁 언 학교 동산이나 언덕에서 어린아이들이 헬멧을 쓰고 여럿이 막 눈썰매를 타고 내려와요. 옆에 바위도 있어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 위험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놀아도 사고 났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아이들에게 안전교육을 제대로 하고 안정장비를 언제나 착용하게 하는 데서 차이가 있는지. 또 얼음과 눈이 녹아 질퍽질퍽해지면 유치원 아이들이 그게 재미있다고 장화 신고 막 뛰며 놀아요. 옷 젖는 줄도 모르고 발 시린 줄도 모르고. 한국 선생님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저래도 부모들한테서 민원 안 들어오냐?”고 물어요.

공 : 민원 안 들어오나? (웃음) 이건 선생님들만 얘기할 수 있는 멘트네요.

황 : 스웨덴에서는 아마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게 하는 게 우리나라와 좀 다른 것 같아요. 어떤 결정이든 자기가 결정하게 하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합니다. 그런 교육을 어릴 때부터 하기 때문에 어른이 돼서도 책임을 다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계를 만들면 그 기계에 대한 책임, 선장이면 선장으로서의 책임! 이러니 안전사고가 적은가 봐요.

책임지는 사회! 책임지는 사회가 돼야 비로소 사회적 신뢰도 생깁니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지지 않을 때 절대 신뢰가 생기지 않아요.

공 : 맞아요. 각자가 책임을 안 지면 안전/신뢰 사회의 시작부터 할 수가 없죠. 스웨덴에서 세월호 같은 참사가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황 : 스웨덴에서도 ‘에스토니아호 침몰사고’라는 큰 참사가 있었어요. 1994년 9월 28일 0시 55분 에스토니아호는 발트 해를 지나던 중에 좌초했습니다. 날씨가 아주 좋지 않았어요. 한밤중에 강풍을 동반한 비가 쏟아졌어요. 당시 승객 803명과 승무원 186명으로 모두 989명이 탑승했죠. 선체 앞부분에서 꽝 소리가 들렸고 30분 만에 배가 90도로 기울었어요. 너무나 갑작스럽게 90도로 넘어졌기 때문에, 승객들은 배 위의 구명정이 있는 곳으로 올라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합니다. 승무원이 조난상황을 인지하여 무선으로 메이데이를 외친 때로부터 고작 8분 만에 90도로 쓰러지며 침몰했어요. 너무나 순식간에 침몰했다고 했어요. 989명 중 138명만 구조됐습니다. 선박에서 탈출한 사람 중 1/3은 저체온증으로 바다에서 사망했고요.

그때도 음모론 같은 게 많았어요. 예를 들어, ‘러시아 잠수함이 들이받은 거 아니냐?’부터 세월호 참사와 비슷한 얘기들이 많았어요. 국제위원회를 만들어 진상을 규명했고요. 배를 건져 올릴 것인가? 말 것인가? 논의하다가 배가 침몰한 곳을 무덤으로 만들어 일 년에 한 번씩 바다에 가서 꽃을 던지며 추모를 하고 있습니다.

공 : 가족들이 유해를 원하지 않았을까요?

황 : 우리와는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유족이 그런 결정을 내렸어요. 물론 유해를 건져야 한다는 분들도 있었지요. 논란이 많았지만 결국 바다를 무덤으로 생각하며 그곳에서 추모하기로 했답니다. 하지만 유족의 마음이야 어딘들 다를까요? 그 마음이 오죽했겠어요? 꽃 한 송이 꽃 한 다발을 바다 속으로 던지며 오열과 눈물을 삼키는 것을 보며 우리들 눈시울도 많이 젖었지요.

공 : 참사의 진상조사는 전부 공개적으로 한 거죠?

황 : 당연하죠. 에스토니아, 핀란드, 스웨덴 정부는 1994년 9월 29일 합동 사고 조사 위원회(The joint Estonian/Finnish/Swedish Accident Investigation Commission, JAIC)를 설립했고, 조사위원회는 1997년 12월 최종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 조사 외에도 국제기관에 의뢰해 여러 번에 걸쳐 사고 원인을 조사했어요. 세월호 참사는 진상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게 큰 문제잖아요. 7시간 동안 대통령은 뭐 했냐, 정부는 뭐 했냐, 해양경찰은 초동대응을 왜 그렇게 했냐, 선장은 자기만 살려고 혼자 빠져나오고... 이런 엄청난 문제점들이 있잖아요. 보통사람들이 용납하기 어려운 상황이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에스토니아 경우는 승무원이 구조신호인 메이데이를 바로 치고, 구조 선박과 헬리콥터가 떠서 최대한 구조한다고 했는데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침몰해서 큰 참사로 이어진 거죠.

지금도 귀에 생생해요.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 S.O.S, S.O.S"
배에서 구조신호 치는 소리를 라디오에서 계속 방송했거든요. 세월호 선장은 그런 것도 안 했나요? 왜 우리는 한 번도 당시 구조요청을 들어보지 못했죠?

공 : 세월호는 오전 8시 52분 32초에 탑승객인 학생이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에 최초로 신고했어요. 최초 신고자인 학생이 던진 첫마디는 "살려주세요!"였고, 전남소방본부는 바로 목포해경으로 넘겼습니다. 목포해경은 재난 발생 시 기본사항인 선박 이름부터 물어야 하는데 최초 신고자인 학생에게 계속 경도와 위도를 말하라고 했고요. 구조신호부터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죠.
 

최근 황선준 원장의 아내 '레나 황'은 여름 휴가 한 달을 남편과 보내려고 한국에 왔다.

 
불필요한 정책은 다 폐지하고 조직 내 소통 위해 노력

공 : 마지막 질문입니다. 경남교육연구정보원장님으로 계시면서 정책, 조직문화 등 많은 변화를 이끄셨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들이 있나요?

황 : 우선, 필요 없는 정책을 다 폐지했습니다. 우리는 일을 너무 많이 하는 데 문제가 있어요. 많이 하는 일들이 얼마만큼 효과가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그냥 관성적으로 합니다. 해왔던 일 중 효율적이지 않은 일들은 다 폐지했어요. 폐지할 때 엄청 반대가 심할 거라고 했는데 한 사람도 반대 안 했어요. "어떻게 그런 걸 폐지했습니까. 대단합니다. 진작 없어져야 할 일이었다."라는 말을 들었죠. (웃음) 일을 할 때 중요한 점 두 가지가 있습니다. 꼭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하고, 하는 일은 질 높게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소통에 중점을 뒀습니다. 예를 들어, 한 부서에서 어떤 부서원이 하는 일을 다른 부서원이 모르거나, 부서 간에 서로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면 안 됩니다. 그래서 각 부장들에게 그달의 중요한 일을 모든 직원에게 보고하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부장이 왜 일반 직원에게 보고하냐고 하더라고요. 보통 보고는 상사에게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제가 그랬습니다. "그래야 다른 부서에서 뭘 하는지 안다."라고.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 전체 토론회를 하고요, 매주 금요일 오후 3시~5시에 세미나를 합니다. 금요 세미나는 교육부터 정치까지 중요한 이슈들을 제가 신문 스크랩해서 주면 자율적으로 열 몇 명의 직원이 모여서 공부하고 토론하는 방식입니다. 스웨덴에서는 일과 관련해 직장에서 토론하는 문화가 일상화돼 있어요. 그런데 아직 우리는 토론 문화가 익숙하지 않으니 제가 먼저 주도하는 형식으로 합니다.  

또, 원장으로서 다른 분들이 잘 하지 않은 게 있다면...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기'가 있어요. 취약한 지역의 한 초등학교에 가서 4학년 아이들에게 한 학기 동안 책을 읽어줬어요. 한 학기 끝나고 나서 가을 학기에도 읽어주기를 원하면 연락하라고 교장 선생님에게 얘기했는데 연락이 안 오는 거예요. 나중에 들어보니까 4학년 선생님들이 극구 반대했대요. 그 이유는 원장님이 애들한테 너무 인기가 많다고.

공 : 하하하. 원장님께 인기를 뺏겼구나.

황 : 처음 갔을 때는 애들이 여기저기 앉거나 누워 있는 애도 있었는데, 두 번째 갔을 때는 교실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세 번째는 제 자리를 마련해 놓고 삥 둘러서 앉는데 제 옆에 앉으려고 막~ 서로 싸웠어요. 그렇게 책 읽어주는 걸 좋아했어요.

공 : 그렇게 좋아했는데 가을 학기에 못 읽어주셔서 아쉬우셨겠어요.
 

황선준 원장은 평소 빨간 배낭을 메고 걸어서 출퇴근하고, 여가 시간에는 집 근처 호수 주변을 뛰거나 등산을 하면서 건강관리를 한다고 한다.


[ 어려서부터 고집 쌔고 호기심 많은 황선준 원장은 고국의 미래를 생각하며 서른 가까운 나이에 겁 없이 스웨덴으로 떠났다. 스웨덴에서도 고국에 대한 사랑은 변치 않았다. 더 깊어갈 뿐. 

황선준 원장은 26년의 스웨덴 생활을 접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인생 3모작을 짓고 있다. 

때론 진지하게 때론 유머러스하게 인터뷰에 응해준 황선준 원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오랜 시간의 고민이 묻어 있었다. 사회 다방면에 걸쳐 깊이 있게 고민하고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매일매일 공부하는 민주주의자 황. 선. 준.

황선준 원장은 우리나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민주주의자로 설 때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결코 짧지 않은 기사를 5회 동안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과 오랜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신 황선준 원장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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