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을 엮는 사회적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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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을 엮는 사회적경제
  • 2018.04.24 11:09
  • by 라이프인

성공회의 송경용 신부는 ‘걷는교회’ 사제다. 7년간의 영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인 2010년 1월, 북한산에서 첫 미사를 하면서 걷는교회가 시작되었다. 특정한 예배당 건물을 두지 않고 어떤 곳도 성소가 될 수 있는 교회다. 반도체 노동자 인권단체 ‘반올림’의 농성 텐트에서, 세월호 광장에서, KTX 해고 승무원들과 함께 서울역에서 예배를 행했다. 송경용 신부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송경용 신부는 그동안 여러 사회적경제 관련 일을 해왔다. 송 신부의 전·현 직함도 다양하다. 국제사회적경제포럼GSEF 공동의장, 서울사회적경제네트워크 이사장(전), 성북구 사회적기업 육성위원장(전), 사단법인 나눔과 미래 이사장 등등. 인터뷰를 한 2월 14일에도 공정무역 관련 회의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지자체·기업에서 사회적경제에 대한 강연도 많이 한다. 최근 한 기업체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성직자로서 사회적경제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나도 그게 궁금했다. 그 질문으로 시작해보자.

차형석(이하 차) : 신부님 이름으로 검색을 해보면 사회적경제와 관련한 기사가 많이 나온다. 2007년에 펴낸 저서 『사람과 사람』을 보면 ‘송경용 신부 하면 사회복지운동 하는 사람’이라는 말도 나온다. 사회복지와 사회적경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송경용(이하 송) : 사회적경제든 사회복지든 내 관심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인간적 존엄을 지키면서 먹고살 수 있을까. 항상 고민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가난이 주는 처절함을 경험했고, 가난의 덫을 헤쳐 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실감했다. 1979년에 연세대 건축학과에 들어갔는데, 대학 입학 전에 룸살롱 허드렛일, 신문배달, 공장 노동, 독서실 총무 등 14가지 일을 해보았다. 야학을 하면서, 상계동·봉천동에서 ‘나눔의 집’을 하면서 가난한 이웃과 함께했다. 사회적경제든, 사회복지든 나에게는 추상적 가난이 아니라 구체적 가난을 실질적으로 벗어나게 만드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차 : 『사람과 사람』에 야학과 나눔의 집에 대해 자세하게 썼다.

송 : 1979년 9월에 선배 둘의 권유로 상계동 야학(상계적십자청소년학교)에 갔다. 그 야학에서 가난한 청소년 노동자들을 만났다. 야학은 나에게 제2의 고향이었다. 그곳에서 신앙을 갖게 되었다. 1984년, 그 유명했던 상계동 철거 현장에서 기도를 했다. 절로 기도가 나왔다. 깡패들이 야학 제자들이 살던 집을 다 때려 부쉈다. ‘주님, 다시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게 해주십쇼. 제가 이 장면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왜 그 기도를 했는지 모르겠다(웃음). 그 기도 때문에 여태까지 이러고 있다(웃음). 야학에서 신앙을 갖게 되었고, 1986년에 성공회 천신신학교에 들어갔다. 신학교에 들어간 이후 상계동 나눔의 집을 만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집이자 교회다. 나눔의 집을 하면서 목표가 있었다. 첫째,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체적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고기를 주지 말고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라? 너나 가서 낚시해라(웃음). 삶은 한 시도 유예할 수 없다. 특히 가난이 겹치면 정말 괴롭고 힘들다. 그래서 어린이집, 공부방, 어머니교실처럼 실제로 도움이 되는 일을 나눔의 집에서 먼저 했다. 둘째, 가난한 사람들이 정말 주인이 되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엘리트들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실제로 운영하는 곳을 만들고 싶었다. 나눔의 집을 가난한 이들의 지역운동센터, 열린교회로 만들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상계동 야학, 철거싸움을 거치면서 파괴되고 해체되고 다 떠나더라. 굳은 맹세와 무수한 말들을 남겼던 이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나중에 보면 구부러진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그 친구들의 삶이 바로 내 삶이었기 때문에 떠날 수가 없었다. 그때 내린 결론이 이렇다. 사랑은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이다.

신학교를 다니는 스물일곱 살 청년 송경용은 사제 서품을 받기도 전인 1986년에 교회의 지원을 받아 상계동 나눔의 집을 세웠다(1991년에 부제서품을, 1993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박경조 신부, 김성수 주교 등이 송 신부를 격려하며 ‘병풍’이 되어주었다. 송 신부는 1988년에 성북 나눔의 집을, 1990년에 봉천동 나눔의 집을 열었다. 송경용 신부는 봉천동에서 11년을 함께 살았다. 봉천동 시절, 송 신부는 노동자협동조합을 ‘발견’하게 되었다.

차 : 노동자협동조합 ‘나레건설’을 만들었는데?

송 : 1992년 9월에 나눔의 집 화재 사건이 났다. 봉천동 사람들이 나눔의 집 재건축을 도왔다. 일하는 분들에게 노동자협동조합을 소개하고 ‘우리도 한번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때 노동자협동조합 ‘나누며 섬기는 건설노동자 공동체(나섬건설)’가 만들어졌다. 그 당시에 빈민운동의 선배인 허병섭 목사님과 함께 공부를 많이 했다. ‘어떻게 하면 가난한 이들이 함께 먹고 살 수 있을까’ 공부 주제였다. 외국에는 뭐가 있나 찾아보았다. 일본의 노동자협동조합, 몬드라곤, 이탈리아 레가코프 등을 발견했다. 이거다, 싶었다. 허 목사님은 월곡동 달동네에서 건설노동자 공동체 ‘일꾼두레’를 만들었다. 나중에 둘이 합쳐 ‘나레건설’이 되었다.

차 : 당시에는 협동조합 기본법이 없었는데?

송 : 협동조합 법인을 만들 수가 없어 주식회사로 하되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회사 이름에 ‘협동조합’을 붙이면 안 된다고 하기에 ‘니들도 골탕 먹어봐라’ 해서 제일 긴 이름을 만들었다. ‘나누며 섬기는 건설노동자 공동체 나레종합건설’. 등기소 갔더니 ‘정말 이 이름 다 쓸 거냐, 줄여달라’ 하기에 ‘못 줄인다’고 했다. 아마 역사상 가장 긴 회사 이름 아닐까(웃음). 우리끼리는 ‘나레건설’이라고 불렀다.

창립하고서 명함을 만들었는데, 장년이신 분들이 첫 명함을 손을 떨며 받으면서 눈물을 흘리더라. 누구도 기억하지 않고, 기록되지 않은 노동을 해온 분들이다. 처음으로 자기 이름이 새겨진 명함을 받아들던 그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이름은 있지만 자신의 이름 앞에 쓸 수 있는 ‘사회적 이름’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 명함은 그냥 종이가 아니었다. 명함이 있으나 없으나 무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깊고도 깊은 한 인간의 회한을 느꼈다.

차 : 나레건설은 어땠나?

송 : 신문도 만들고 강령도 만들고 했는데, 4년가량 운영하고 쫄딱 망했다(웃음). 평창동의 고급 주택도 짓고, 수주를 제법 많이 했다. 그런데 앞으로는 돈이 들어오는데, 결산을 해보면 적자더라. 우리에겐 경영 능력이 부족했다. 협동조합을 하려면 실제 경영 능력이 있고,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 즈음에 청소회사, 봉제공장, 도시락공장도 만들었다. 기술이 없는 이들이 만들 수 있는 회사들이었다. 봉천동 산동네 주민들과 남산터널 청소를 했다. 터널이 그렇게 긴 줄 몰랐다(웃음). 모두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했는데, 실제 경영 능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출처 - (재)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아카이브

차 : 그때 경험을 바탕으로 자활센터를 최초로 제안했다고?

송 : 1995년에 국민복지기획단 회의 때 ‘저소득계층의 자립과 자활을 위한 생산적 복지의 일환으로 생산자협동조합운동’을 발표했다. 이 발표가 자활센터 설립으로 이어졌다. 지금 자활센터가 하나의 복지 전달 체계가 되었다. 처음에 내 생각은 법과 제도, 정책을 기반으로 노동자협동조합을 만들어 자활센터로 운영하는 것을 구상했다. 복지와 노동의 통합 모델로 자활센터. 노동자협동조합은 그 수단이었다.

‘자활’ 활동을 하는 후배들이 잊지 말아야 할 세 이름이 있다. 최선정 전 보건복지부 장관. 그는 복지부 실장 때 철거민촌에 와서 철거민 철탑에 올라가 막걸리를 같이 마시며 이 문제를 고민했던 이다. 중앙부처 1, 2급 공무원이 철거민 철탑에 올라 막걸리를 마신 건 그가 유일하다. 그리고 연세대 사회복지학과의 이혜경 교수(현재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1995년 국민복지기획단 회의 때 흐트러진 분위기를 다잡고 내 정책 제안을 끝까지 발표하도록 해준 분이다. 자활센터를 정책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KDI에서 빈곤 문제를 연구하던 권순원 박사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생산자협동조합운동에 대해 정부 측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논문을 쓰고 민관토론회를 주선했다. 자활사업의 방아쇠를 당겨준 열성적인 경제학자였다. 나레건설의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는 봉천동에서 지역 활동을 하던 송경용 신부가 ‘중앙무대’로 진출한 계기가 되었다. 송 신부는 노숙인들이 서울역으로 몰려든다는 뉴스를 보았다. 봉천동에서도 몇 가족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고, 몇 명은 서울역에서 노숙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서울역으로 달려갔다. 얼마 뒤에 복지부에서 연락이 왔다. 송경용 신부는 민관이 함께하는 ‘전국 실직노숙자 대책협의회’를 조직했다. 종교계 사회복지대표자협의회도 만들었다. 지금은 익숙해진 푸드뱅크를 처음 시작한 것도 송경용 신부였다.

차 : IMF 외환위기 때 ‘민관’이 함께하는 일을 많이 추진했다.

송 : 우연찮게 해외에 나갈 때마다 외국의 노숙인 시설을 많이 보았다. 도시화, 산업구조 개편 등으로 우리도 대비를 해야 한다고 봤다. 민관협력기구를 만들면서 ‘실직 노숙자’라는 말을 고집했다. 이름에 정체성이 들어가고 책임 주체가 규정된다. 명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책임이 달라지니까. 정부는 ‘실직’ ‘노숙자’라는 말을 넣고 싶어하지 않았다. 한 달 싸워 이름을 정하고 민관 협력기구를 만들었고, 종교계를 설득했다. 노숙자들이 대피할 쉼터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푸드뱅크는 복지부에 서울 동서남북을 담당할 4대의 트럭을 달라고 요청한 게 시작이었다. 미국 뉴욕에 있는 성공회 교회의 ‘두 번째 추수(second harvest)’ 운동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교회 안 의자를 밀어놓고 노숙자들을 모아서 기업, 개인에게서 기부 받은 음식을 나누어 주더라. 첫 번째 추수는 밭에서 하고, 이런 방식으로 두 번째 추수를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그렇게 정했다.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걸 본떠서 기업, 호텔, 종교계 등으로부터 음식을 기부 받아 먹을거리 나눔운동을 시작했다. 그게 푸드뱅크 운동의 시작이다.

차 : 꽤 오랫동안 영국에서 생활했다고 들었다.

송 : 2003년에서 2009년까지 총 7년을 영국에서 있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을 위한 연대회의 집행위원장, 공동모금회 개혁 운동, 자활센터협회 일, 실업대책, 노숙인·장애인·청소년 쉼터 일을 계속 하면서 건강이 너무 안 좋아졌다. 영국에서 런던 성공회 한인교회 주임사제 등으로 있었다. 거기에 있으면서 건강을 회복했다. 영국에서도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등 사회적경제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났다. 한국에서는 흔히 사회적기업이라고 하면 취약계층 일자리를 만드는 기업 정도로 인식한다. 영국에서는 지역사회를 변화시키고, 사회를 혁신하는 대안적 경제 모델이더라. 한국에서 활동가들이 오면 많이 소개했다. 안내하고 일정 짜주고 같이 술 마시고(웃음). 영국에 있는 동안 한국의 활동가들이 1,000여 명 넘게 찾아온 것 같다.

차 : 귀국해서 다시 사회적경제 일을 했는데.

송 : 영국에 있을 때 귀국하면 사회적경제 일은 안 하려고 했다. 그 전에 건강을 해칠 정도로 너무 했으니까. 2009년 귀국하고 성공회대에서 1년 동안 아시아시민사회대학 학장으로 일했다. 그런데 사회적경제 쪽 사람들이 계속 찾아오는 거다. 서울사회적경제네트워크를 조직해야 한다고, 석 달을 찾아오기에 결국 조건 걸고 수락했다.

차 : 어떤 조건이었나?

송 : 사회적경제 발전을 위해 내가 할 일을 하겠다고 했다. 사회적경제라는 우산을 만들자. 이 안에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자활센터, 마을기업 등이 다 들어오게 하자. 그리고 사람을 키우자. 사회적경제가 발전하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우수한 사람이 들어오려면 운동장이 필요하다. 사회적경제가 기업 활동인데 시장이 있어야 사람이 들어올 거 아닌가. 대기업 중심 사회에서 ‘보호된 시장’을 만들어야 하고, 그러려면 법과 제도와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자면 우호적인 정치 세력이 필요하니, 그 조직을 맡아보겠다고 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 지도자들을 만났다. 사회적경제에 관심 있는 기초단체장, 지방의원들을 만났다. 각 당에 사회적경제위원회가 생기고, 단체장들의 모임이 생긴 게 그 성과다. 또 양대 노총 전·현직 위원장과 만나 사회적경제와 노동, 사회적금융 관련 공부를 했다. 사회적가치기본법을 소개했다. 지난 대선 때는 사회적경제를 국가 아젠다로 만들기 위해 여러 경로로 노력했다.

차 : 사회적가치기본법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

송 : 영국의 사회복지, 사회적경제 관련 뉴스를 매일 챙겨보았다. 2012년에 크리스 화이츠(Chris Whites)라는 영국 보수당 의원이 사회적가치법안(Social Value Act)을 발의해 통과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영국에서 이 법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추이를 살폈다. 될까, 했는데 통과되더라. 공공기관이 공공서비스를 민간으로부터 구매할 때 사회적 가치를 고려하도록 규율하고 있다. 영국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공공기관이 최저가 입찰방식을 택했다. 그러다보니 공공서비스가 부실해진다. 국민의 세금을 쓰면서 행정기관, 시민 다 불만이 생겼다. 크리스 화이츠 의원이 공공기관 입찰에서 사회적 가치기준을 활용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 법이 통과되었다고 해서 법안 전문을 받아보았다. 양동수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한국적 현실에 맞게 안을 만들었다. 그때 문재인 당시 의원을 만났다. 문재인 의원이 법안을 20분 동안 읽어보더니 첫 마디가 “무서운 법이군요” 하더라. 법조인 출신답게 법안의 핵심을 바로 꿰뚫어 읽은 거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맞습니다. 이 법으로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습니다. 물신주의 사회를 바꿀 수 있습니다.”

공공기관이 입찰 기준을 바꾸면 민간기업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영국이 그랬다. 영국의 수천 개 기업이 기준을 바꾸었다. 인권, 노동권, 안전, 생태, 사회적 약자 배려,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등 여러 사회적 가치에 가점을 두면 사회가 분명 바뀐다. 결국 문재인 의원이 사회적가치기본법안(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법안)을 발의했다. 문재인 의원실과 공청회를 하기도 했다. 그 뒤 정치적 사건들이 이어져 국회통과가 되지는 못했다. 지금 김경수 의원을 거쳐 박광온 의원이 발의한 상태다.

차 :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송 : 개인적으로는 반반이라고 본다. 하지만 대통령의 행정권한으로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의 평가 기준에 사회적 가치가 도입되고 있다. 예전에는 공공기관장 인사나 공공기관 평가 때 경영 효율성을 주로 봤다면 ‘사회적 가치’에 대한 평가 배점을 더 높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적 가치가 행정의 기준이 되고 있다. 사회적 가치를 모르면 공공기관장 하기 어려운 시대가 왔다. 행정에 일부 도입되었지만 정권이 바뀌어도 안정적으로 시행할 수 있도록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법 하나로 우리 사회의 많은 기준이 바뀔 수 있다.

차 : GSEF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데?

송 : 대학에 있을 때도 사회적경제 관련 대회를 주최했다. 처음에는 아시아 저개발국가와 함께할 수 있는 사회적경제를 조직하려고 했는데, 박원순 시장과 해외를 함께 다니면서 ‘글로벌 단위로 키우자’고 힘을 모으게 되었다. 민관 협치로 박원순 시장과 공동의장을 맡았다. 2013년에 처음 대회를 준비할 때는 500통 메일을 보내면 서너 통 답장이 오는 수준이었다. 서울에서 무슨 사회적경제를 조직하느냐고, 하는 느낌이었달까. 그런데 2016년 몬트리올 대회 때 65개국 355개 도시 대표, 민간 대표 2,000명이 왔다. 올해 10월 빌바오 대회에는 100개국 3,000명가량 올 것 같다. 우리가 만든 국제기구가 세계 최대의 사회적경제 조직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사회적경제가 전 세계적 트렌드이기도 하다.

차 : 매년 협동조합 실태조사가 나오면 협동조합 1만 개인데, 절반이 사업을 중단했다며 비판하는 기사가 나오곤 한다.

송 : 한국의 재벌은 어떻게 키웠나. 행정이 적극적 산업(지원)정책을 펼친 것이다. 땅 주고 세금 깎아주고 사업 영역 나누어 주고. 사회적경제를 새로운 산업으로 봐라. 유럽에서는 사회적경제가 10~11%를 차지한다. 분명한 실체가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사회적경제를 활성화한다고 하면 사회주의니 뭐니 온갖 소리를 해대는 이들이 있다.

어떤 산업을 일으키려고 하면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하는 말 중에 ‘개나 소나 법칙’이 있다. 새로운 정책을 하려고 할 때 다 냉랭하고 지켜보고만 있으면 일이 안 된다. 처음에는 ‘개나 소나’ 달라붙고 붐이 일어야 알곡이 남는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본다. 붐업이 일어나 지금 이 정도까지 온 것이다.

차 : 사회적경제에 대한 생각은?

송 :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주류 경제학자들조차 ‘따뜻한 자본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전 세계적으로 부의 불평등, 양극화가 너무 심해졌고, 대안경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유엔이 왜 2012년을 세계 협동조합의 해로 선포했을까. 사회적경제에 대한 세계적인 컨센서스가 있었던 거다.

빌게이츠, 워런 버핏 같은 부자들도 불평등 해소를 위해 세금을 더 내겠다고 한다. 한국의 부자들은 어떤 세상을 원하는지 정말 들어보고 싶다. 이렇게까지 불평등이 심한 사회를 두고서, 자유만 이야기하고 규제만 풀어달라고 한다. 사회적경제만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도 없다. 이 불평등과 양극화의 덫을 헤쳐가려는 작은 노력이자 몸부림인데, 이 실험마저 헤치려고 하면 안 된다.

나에게 유럽을 정의하라면 ‘수만 개의 사회가 그물처럼 얽혀 있는 사회’라고 말한다. 그물에는 중심이 없다. 그물의 한 코, 한 코가 중심이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서로 당겨주고 같이 작동해야 그물로 쓰인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서로 존재하는 것. 사회적경제의 원리도 이와 같다.

2007년에 송경용 신부가 쓴 『사람과 사람』에는 그가 어린 시절, 청년기에 겪은 지독한 가난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송 신부는 상계동 야학, 나눔의 집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했다. 이런 삶의 궤적은 사회적경제 활동으로 이어졌다. ‘사회적경제는 구체적 가난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벗어나는 하나의 방편이었다’는 그의 말은 협동조합이 경제적 약자들의 강력한 필요의 산물이라는 점을 다시금 일깨운다. 송경용 신부는 ‘법, 제도, 정책’을 강조했다. 개인이 이루어낸 성과가 한 사례로 그쳐서는 안 된다. 법과 제도를 만들고 정책을 통해 보편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봉천동의 경험을 발제해 자활기관 제도화를 이끌어내는 등 여러 차례 ‘민관 협치’의 앞자리에 섰다. 법·제도·정책을 통한 보편화. 송경용 신부는 사회적경제의 큰 틀을 고민한다. 그런 면에서 송 신부가 사회적경제 생태계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사회적금융 부문에 관심을 두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사회적금융에 대해 공부하고 여러 가지 일을 추진했다. 민간자금을 모으고 보증제도를 활용해보려 했는데, ‘박근혜 치하’라 쉽지 않았다. 사회적경제가 성장하기 위한 마지막 퍼즐이 사회적금융이다”라고 말했다. “너무 바빠 일을 줄여야겠다”고 하지만 ‘사회적경제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날 것 같다, 송 신부님’. 송경용 신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어떤 영화 제목이 내내 떠올랐다.

 

*이 글은 <생협평론> 30호에 게재된 기사로 <생협평론>과 라이프인은 파트너쉽을 통해 기사 제휴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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