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피해자들 "진상규명·재발방지·일상회복 지원, 우리의 권리이자 정부 의무"
상태바
참사 피해자들 "진상규명·재발방지·일상회복 지원, 우리의 권리이자 정부 의무"
'재난·산재 유가족·피해자 의료지원 협약 및 피해자 권리선언', 20일 녹색병원에서 진행
"우리 사회의 아픔을 기억하고 널리 알리는 것이 치유하는 과정"
  • 2023.03.22 15:06
  • by 노윤정 기자
▲ '재난·산재 유가족·피해자 의료지원 협약 및 피해자 권리선언' 참석자들이 피해자 권리 보장에 대한 요구를 담은 팻말을 들고 있다. ⓒ라이프인
▲ '재난·산재 유가족·피해자 의료지원 협약 및 피해자 권리선언' 참석자들이 피해자 권리 보장에 대한 요구를 담은 팻말을 들고 있다. ⓒ라이프인

'재난·산재 유가족·피해자 의료지원 협약 및 피해자 권리선언'이 20일 오전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진행됐다. 이날 행사에는 재난·산재 피해자 및 유가족(이하 '참사 피해자'로 통칭)과 녹색병원 관계자, 생명안전 시민넷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 ⓒ라이프인
▲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 ⓒ라이프인

녹색병원은 이날 협약을 통해 참사 피해자들에게 건강검진 및 치료비 일부를 지원하기로 했다.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참사 피해자의 가족들이 조직되지 못한 적이 있다"며 "일본에는 과로사로 사망한 분들의 유가족들이 조직돼 있다. 그뿐 아니라 전국에 지부가 있고 그분들이 정기적으로 모인다. 그런 모습을 보고 당사자 운동이 활발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이어 "그것을 위해 녹색병원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고민했다. 그런데 생명안전 시민넷 창립 5주년 행사에 참석했을 때 유가족들이 조직돼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유가족들이 투쟁의 현장에 계신 것을 보고 이분들의 건강을 돌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협약의 취지를 설명했다.

스텔라데이지호 참사 당시 실종된 허재용 선원 어머니인 이영문 씨는 먼저 녹색병원에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다가오는 3월 31일은 스텔라데이지호가 침몰한 지 6년이 되는 날이다. 다시 말하면 내 아들이 실종된 지 6년이 되는 날이다"며 "왜 아들이 돌아오지 못했는지 원인이라도 알게 해 달라고, 유해라도 수습하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렇게 6년이 지나면서 내 몸과 마음은 망가졌다. 그러나 자식을 앞세운 부모는 아프다고 말하는 것도 죄책감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서 병원 치료를 마다하고 병을 키울 때가 많다. 그러나 내 자식이 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는지 원인을 밝히려면 나 자신을 돌보면서 버텨야 한다"고 참사 피해자들을 위한 의료 지원에 발 벗고 나선 녹색병원에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을 전했으며 "물리적 거리의 한계로 녹색병원 지원을 받지 못하는 다른 지역 피해자들을 위해 녹색병원과 뜻을 같이 해주는 병원이 전국에 확산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이 씨는 "사실 이러한 지원은 국가가 나서서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누구라도 재난, 산재 참사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투쟁하는 것은 우리가 겪은 끔찍한 일을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겪지 않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고 전했다.

▲ 스텔라데이지호 참사 피해자인 이영문 씨. ⓒ라이프인
▲ 스텔라데이지호 참사 피해자인 이영문 씨. ⓒ라이프인

김훈 생명안전 시민넷 공동대표는 "참사 피해자들의 절망과 상처는 몸과 마음에 각인되어 한평생 헤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고통과 슬픔이야 말로 참사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난 참사나 산재는 피해자 중심주의로 생각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피해자와 책임자를 대등한 입장에 두고 양쪽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자기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피해자의 고통과 슬픔에 현실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녹색병원의 의료지원 협약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지원이 법제화될 수 있기를 바라고 그 시발점이 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녹색병원에서 지원을 받은 참사 피해자도 자리에 참석해 협약을 축하했다. 김시녀 씨(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근무한 후 뇌종양 판정을 받은 한혜경 씨 어머니)는 본인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참사 피해자가 겪는 어려움을 먼저 전한 뒤 "'반올림'(반도체 도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에 소속되면서 딸이 왜 뇌종양에 걸렸는지 이유를 알기 위해 투쟁하기 시작했다"며 "거리에서 먹고 자면서 시위를 할 때 사실 딸을 두고 다니기 힘들었다. 그런데 녹색병원에서 2년 넘게 치료를 받으면서 내가 마음 놓고 싸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참사 피해자들의 치료를 위해서 애쓰고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는 녹색병원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의료 지원 협약뿐 아니라 참사 피해자들의 권리 선언도 이루어졌다. 이날 발표한 피해자 권리 선언은 생명안전기본법안 중 피해자 권리에 관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신속하고 적정한 구조를 받을 권리, 사고와 가족의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알 권리, 시신을 인도적으로 인계 받을 권리, 애도하고 추모할 권리 등을 담고 있다. 또한 참사 피해자들은 피해자의 권리와 지원 체계 구축을 위한 입법을 정부와 국회에 요구했다.

이와 관련하여 전재영 대구지하철참사희생자대책위원은 "(참사를 겪은 후) 어느 순간 사회적 약자가 돼 있더라. 그렇다 보니 다른 사회적 약자를 보게 됐다"며 "혹자는 이제 그만 잊으라고 하는데, 잊고자 한다고 잊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참사로 인한 아픔을 간직하고 기억하고 승화해서 자료로 남겨야 같은 아픔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며 사회적 약자들의 피해 지원에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감추고 잊으려고 한다고 해서 아픔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의 아픔을 기억하고 널리 알리는 것이 치유하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김혜영 씨(과도한 노동과 비정규직 스태프 처우 문제를 고발하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故이한빛 PD의 어머니)는 "참사 피해들은 가족의 상실이라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사회적 고립이라는 고통까지 겪고 있다. 여기에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쳐서 아파도 병원을 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며 "산재 승인을 받기까지 치료비 부담이 크고 산재 승인 과정이 길고 까다롭다. 불안정 노동자들은 산재 보험 적용도 못 받는 등 심각한 상황이다. 이런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참사 피해자들을 위해 녹색병원이 나섰다. 정부가 할 일을 민간 병원이 나선 것이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녹색병원의 활동이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협약이 마중물이 되어서 전국 곳곳으로 퍼지기를 바란다. 어울러 피해자 권리 선언에 명시된 권리와 피해 배상을 국가의 책무로서 보장할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고 강조했다.

▲ 참사 피해자 의료 지원 협약 문서에 서명 중인 김훈 생명안전 시민넷 공동대표, 참사 피해자 대표 김미숙 씨(태안화력발전 故김용균 노동자 어머니),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 ⓒ라이프인
▲ 참사 피해자 의료 지원 협약 문서에 서명 중인 김훈 생명안전 시민넷 공동대표, 참사 피해자 대표 김미숙 씨(태안화력발전 故김용균 노동자 어머니),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 ⓒ라이프인

이후 피해가족 9명의 낭독으로 '재난·산재 참사 피해자의 권리 선언'이 이루어졌고, "피해자의 인권과 권리를 보장하라", "피해 지원 체계를 신속히 제도화하라", "모든 사람의 안전권을 보장하라”라는 구호를 제창했다. 뒤이어 참사 피해자 대표인 김미숙 씨(태안화력발전 故김용균 노동자 어머니), 임상혁 원장, 김훈 공동대표가 협약 문건에 서명을 진행했다.

마지막으로 송경용 생명안전 시민넷 공동대표는 "정상적인 국가라면 피해자들이 직접 권리를 선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현대 국가가 성립하고 국가를 지탱하기 위해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함이다"고 참사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응답하지 않는 정부의 태도를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 속에서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참사 피해자들을 위해 녹색병원의 모든 직원들이 나서준 것이 정말 감사하다. 누가 가족을 잃은 상처를 보듬고 치료해 줄 수 있겠나. 곁에서 같이 비 맞아 주고 손잡아 주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우리의 생존을 늘려갈 수 있을 뿐이다"고 말했다.

또한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며 "지난 4년 동안 피해자들과 법률 전문가들이 법안을 만들었다. 법안의 핵심은 피해자 중심주의다, 피해자의 권리를 규정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각종 재난 관련 법을 보니 전부 행정 위주의 법이다. 피해자의 권리를 규정한 법은 없다. 참사 피해자는 그저 행정 처리의 대상이었다. 그런 시대를 마감하기 위해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에 총력을 다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하 '재난·산재 참사 피해자의 권리 선언' 전문.

우리는 재난과 산재 사고로 인해 아직도 싸우고 있는 유가족과 생존자들입니다. 합하여 '참사 피해자'라고 부르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만약 여러분의 가족이 어떤 사고로 죽거나 다쳤다는 전화를 받는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가장 먼저 "우리 가족은 지금 어디 있나요?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나요?"라고 물어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몇 년,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확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주요 국제인권조약들은 인권침해 피해자의 '진실, 정의, 배상에 대한 권리'를 국가가 존중, 보장해야 할 적극적 의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는 참사 피해자들에 대해 법적 정의나 어떤 권리도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족을 잃거나 다쳐서 고통스러운 참사 피해자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거리에서 투사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 참사 피해자들도 직접 참사를 겪기 전까지 내가 피해자가 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국가나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안전 시스템을 만들지 않고 책임 회피만 되풀이하는 사이 우리 국민 누구라도 참사 피해자가 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아픔을 다른 국민들이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 '생명과 안전'은 허울 좋은 말로만 지켜지지 않습니다. 피해자들은 정권의 골칫거리가 아닙니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누구나 안전하게 생활하고 일할 수 있도록 국민의 권리로서 보장 받아야 합니다. 이에 우리 참사 피해자들은 국민 모두를 위해 '피해자의 권리'를 선언합니다. 이 선언이 하루빨리 구체적인 법적 권리가 되길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통 속에서 깨달은 교훈이자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선물입니다. 참고로 이 선언에서 '국민'은 외국인, 이주노동자 등 국적을 넘어 보편적 인권으로서 안전권을 보장 받아야 하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첫째, 국민들은 참사 피해자가 되었을 때 가족의 생사와 이동경로, 사망에 이르게 된 경위와 원인, 향후 수습 과정 등 관련 정보를 정확하게 알 권리가 있습니다.

둘째, 국민들은 참사 피해자가 되었을 때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진상규명을 통해 책임자들이 법적, 사회적 책임을 지고 국가나 기업이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하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셋째, 국민들은 참사 피해자가 되었을 때 신속하게 구조 받을 권리가 있음은 물론, 유가족들은 시신과 유류품을 조속하고 인도적으로 인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넷째, 국민들은 참사 피해자가 되었을 때 피해자들끼리 만나고 위로하며 연대할 권리가 있습니다.

다섯째, 국민들은 참사 피해자가 되었을 때 언론과 정부, 온라인, 타인 등의 2차 가해와 인권침해로부터 보호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여섯째, 국민들은 참사 피해자가 되었을 때 다친 마음과 몸을 충분히 치료 받고 필요한 법률적 지원을 받는 등 ‘일상 회복을 위한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일곱째, 국민들은 참사 피해자가 되었을 때 사고의 원인 조사와 재발 방지 대책 수립, 피해지원책 마련 등 모든 과정에 참여하고 의견을 존중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여덟째, 국민들은 참사 피해자가 되었을 때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희생자를 추모하고 기억할 권리가 있습니다.

아홉째, 국민들은 참사 피해자가 되었을 때 합당한 배·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고 그로 인해 혐오나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열째, 국민들과 참사 피해자들은 지역사회나 일터 등 소속 공동체에서 참사가 일어났을 때, 무너진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 상호 연대하고 국가와 그 공동체의 회복 노력과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2023년 3월 20일

대구지하철희생자대책위,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가습기살균제참사 범단체.victims, 스텔라데이지호 대책위, CJE&M의 tvN 이한빛 PD 유가족, 태안화력발전소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노동자 유가족, 경동건설 신축현장 하청노동자 고 정순규 님 유가족, 한익스프레스 남이천물류창고 신축현장 산재 고 김형주 님 유가족, 삼성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한혜경 님 가족,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채경선 님 가족, 생명안전 시민넷
(위의 각 단체와 유가족, 피해 가족을 대표하여 윤근, 전재영, 김순길, 강지은, 조순미, 이영문, 허경주, 김혜영, 김미숙, 김영희, 정석채, 김선애, 김시녀, 채경선, 김훈, 송경용, 오선근, 오지원, 최희천은 2023년 3월 20일 녹색병원에서 '재난·산재 피해자의 권리'를 선언합니다)

라이프인 열린인터뷰 독점기사는 후원독자만 볼 수 있습니다.
후원독자분들은 로그인을 하시면 독점기사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후원독자가 아닌 분들은 이번 기회에 라이프인에 후원을 해보세요.
독립언론을 함께 만드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요기사
인기기사
  • (07317)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로62길 1, 1층
  • 제호 : 라이프인
  • 법인명 : 라이프인 사회적협동조합
  • 사업자등록번호 : 544-82-00132
  • 대표자 : 김찬호
  • 대표메일 : lifein7070@gmail.com
  • 대표전화 : 070-4705-7070
  • 팩스 : 070-4705-7077
  • 등록번호 : 서울 아 04445
  • 등록일 : 2017-04-03
  • 발행일 : 2017-04-24
  • 발행인 : 김찬호
  • 편집인 : 이진백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소연
  • 라이프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라이프인. All rights reserved.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