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오딧세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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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오딧세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
  • 2022.03.10 09:00
  • by 김종걸(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14:11
▲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폴리스의 몰락

진정한 지식인에게는 시대의 위기를 감지하는 특유의 감각기관이 존재한다. 이들은 기득권의 허위를 공격하며, 새로운 시대 질서를 기획하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천대받고 때로는 커다란 영광 속에 삶을 마감한다. 이제부터 우리가 이야기할 스승과 제자,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69-399)와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347)은 그 핍박과 영광의 스토리를 잘 전해준다. 그들이 살아가던 100여 년간은 그리스 도시 문명이 몰락하고 알렉산더의 새로운 세계제국이 등장하는 시기였다. 이 전환의 시대에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독배를 마셨으며, 플라톤과 그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류 철학사의 최고봉으로 우뚝 자리 잡았다.

그리스 도시국가는 동방의 강국 페르시아와의 2차례의 전쟁(기원전 492-480년)에서 이기면서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그 중심에는 아테네가 있었다. 아테네의 시민들은 민주주의라는 자유의 공기 속에 1년에 150일에 달하는 축제를 즐겼으며, 호메로스의 『일리야드』와 『오딧세이』를 암송하고,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와 같은 비극의 명작들을 관람했다. 헤라클레이토스를 잇는 자연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을 탐구하고, 소피스트들은 다양한 연설과 설득의 기술을 일컫는 수사학을 명문가 자녀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300여 개에 달하는 폴리스의 관계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그 불만의 중심에는 아테네가 있었다. 아테네는 많은 주변의 도시국가들을 사실상의 식민지로 만들고 억압했다. 페르시아의 재침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델로스동맹을 결성하고 그리스반도와 주변 지중해 지역의 패권을 유지하려 했다. 많은 폴리스는 위협을 느꼈으며, 또 다른 맹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생겨났다. 양 진영 간의 갈등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터졌으며, 결과는 아테네의 참패였다.

전쟁 후 아테네 정치는 혼란스러웠다. 스파르타의 후원을 받은 30인 참주정은 1년이 안 되어 붕괴했다. 민주정은 회복되었으나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참주정 및 민주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것이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모두 결국은 그리스 북방의 시골국가 마케도니아에 의해 멸망했다. 알렉산더 세계제국 시대의 출발이었다.
 

▲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 가운데 흰 수염을 기른 사람이 플라톤, 그와 대화하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다.
▲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 가운데 흰 수염을 기른 사람이 플라톤, 그와 대화하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다.

소크라테스라는 사람

그리스의 철학은 알렉산더의 말발굽과 함께 전 세계로 퍼져갔다. 진정한 의미에서 서양철학의 시작이었다. 그 출발점은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대상을 자연이 아니라 사람에게 돌렸다. 그리고 사람과 국가(공동체)가 바르게 살아가야 할 '정의'라는 개념에 천착했다. 삶을 바르게(정의롭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철학이 규명해야 할 내용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참모습을 알기는 어렵다. 그가 직접 쓴 글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소크라테스에 대한 지식은 전적으로 플라톤의 기록에 의한다. 플라톤의 모든 저술은 대화체 형식이다. 그리고 『법률』과 같은 일부 저작을 빼고는 모두 소크라테스가 화자(話者)의 중심이었다.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는 또 다른 제자였던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범우출판사)이 전해진다. 이 기록에 대해서 버트런트 러셀(Russell, 1872-1970)은 그 신빙성을 크게 우려한다. 우수하지 못한 자가 제대로 된 기억을 기록했을 리가 없다는 이유에서다(러셀, 『서양철학사』, 플라톤편). 크세노폰 또한 소년 시절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웠으며 훌륭한 직업군인으로서 평생 40여 권의 책을 썼다. 러셀의 평가는 크세노폰의 입장에서는 통탄할 일이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비교가 되는 다른 한쪽은 천재 플라톤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에 비하면 크세노폰의 기록은 너무나 초라하며, 철학적 논제가 아닌 일상사의 기록인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어떤 기록에서든 소크라테스는 세칭 교양 있는 사람의 몰골은 아니었다. 아테네 시민이었으나 신분이 특별히 높았던 것도 아니었으며 가난했고 못생겼다. 들창코에 눈과 배가 튀어나오고, 항상 허름한 옷을 걸치고 맨발로 걸어 다녔다. 나중에 아테네 정치의 풍운아로 커가는 알키비아데스(기원전 450-404년)는 젊은 시절 소크라테스를 무척이나 따라다녔다. 그는 『향연』(천병희 번역 플라톤전집 1권)의 한 대화에서 소크라테스의 외모를 사튀로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괴물)로 비유했다. 그런데도 소크라테스는 많은 젊은이의 우상이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들으면 "심장이 뛰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논박할 수도 없고",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소크라테스는 아주 용감한 군인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출전 시에는 무척 추운 날씨에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가벼운 외투만 걸치고 다녔다. 다른 병사들은 두껍게 껴입고 발을 천과 양털로 꽁꽁 싸맸는데도 그는 맨발로 다녔다. 그랬는데도 신발을 신은 다른 병사들보다 더 쉽게 얼음 위를 걸어 다녔다. 아테네군이 패하여 도망쳐 나올 때조차도 전혀 허둥대지 않았으며, "아군과 적군을 똑같이 응시하며" 당당히 퇴각했었다고 알키비아데스는 전한다.

소크라테스는 항상 아테네 아고라 시장의 한구석에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누구에게 배우라고 강요한 적도 없었으며, 스스로 가르치겠다고 나선 적도 없었다. 당연히 그 어떠한 대가를 받을 적이 없다. 그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그런 행위가 사람들의 미움을 받을 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아테네의 공무에는 참여하려 하지 않았다. 한때 국가의 명령에 따라 한 재판에 참여했었으나, 주변의 많은 위협 속에서도 반대표를 던졌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천병희 번역, 플라톤전집 1권)에서 만약에 그런 일을 계속했었다면 70살까지 살지도 못했으며, 자신의 사명인 철학적 질문을 던지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그는 결국 아테네 시민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아주 훌륭한 철학적 해설서인 나이젤 워버턴(Nigel Warburton)의 『서양철학사』(A Little History of Philosophy)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2400년 전 아테네에서는 한 사람이 너무 많이 질문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했다. 그 이전에도 철학자는 있었으나 진정으로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서 시작된 것이었다, 만약에 철학의 수호성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소크라테스일 것이다."

제자 플라톤

플라톤이 남겨준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과연 누구의 것일까? 아마도 스승과 제자의 공동 작업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사상의 뼈대를 만들고, 플라톤이 그 특유의 명쾌함과 상상력으로 구석구석을 아름답게 채웠으리라.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단순한 기록자이었을 리는 없다. 실제로 소크라테스의 대화에 플라톤은 다 참가하지도 않았다. 소크라테스 사형집행 날의 기록인 『파이돈』에서 플라톤은 현장에 없었다. 만약 현장에 있었다고 해도 제대로 된 메모장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그것도 소크라테스가 죽은 뒤 수년 뒤에, 그 많은 대화를 복기했을 리도 없다. 당시의 필기장은 밀랍으로 만든 판에 뾰족한 골필로 쓰는 것이었다. 그것을 나중에 고가의 파피루스에 옮겨 적는다. 대화가 실시간으로 메모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작품에서의 장면과 플라톤의 나이도 맞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생이며, 플라톤은 427년생이다. 그런데 플라톤의 최대 저작으로 알려진 『국가』에 등장하는 케팔로스는 기원전 421년 혹은 415년에 죽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케팔로스가 죽기 바로 전에 그 대화에 플라톤이 참석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나이는 6살 혹은 17살에 불과하다. 그 나이에 그 어렵고 방대한 분량의 대화를 모두 이해하고 기억했을 리도 없다.

서기 2세기에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나남출판)에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만남을 이렇게 전한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꿈속에서 새끼백조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백조에게 새로운 깃이 돋으며, 백조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날아가 버렸다. 다음 날 플라톤이 제자로 들어왔고 소크라테스는 그가 꿈에서 본 백조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기 전에 작가를 꿈꾸었다. 그의 이름 플라톤은 어깨가 넓고 훌륭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문장표현력이 풍부(플라티네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던 그가 20살 무렵에 소크라테스에게 매료되었다. 역사상 최고의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었다.

플라톤의 문학적 재능은 그의 철학적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있다. 그의 책 속에는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등장인물 간의 치열한 논쟁, 촌철살인의 해학, 논적의 불쾌한 표정, 제자들의 웃음, 죽음 앞에서 초연한 소크라테스의 모습 등 너무나 생동감 있는 장면이 표현된다. 무릎을 치며 감탄하며 읽게 되는 플라톤의 저작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만들어간 불멸의 철학서이자, 문학작품이다.

원래 플라톤은 아테네 명문가의 자손이었다. 아버지는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코드로스, 어머니는 아테네의 입법자 솔론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많은 명문가 자제들이 그렇듯 그도 당연히 정치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했다. 더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망 후 아테네의 정치체제였던 ‘30인 과두정권’에는 그의 외삼촌 카르미데스와 5촌 외당숙 크리티아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테네 민주파에 의해 과두정권이 무너진 다음에도 플라톤의 정치참여 욕구는 여전했다. 그러나 그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계기로 정치에 깊은 환멸을 느꼈고 정치인이 되는 것을 포기했다. 그가 만년에 쓴 「7번째 편지」(플라톤의 편지는 총 13통이 전해진다, 천병희 플라톤전집, 제7권)는 이런 말을 전한다.

"결국 나는 현존하는 모든 국가는 잘못 다스려지고 있고, 그 법률은 행운에 따르는 놀라운 개혁이 없이는 사실상 치유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철학을 찬양하면서, 공공 생활과 사생활에서 무엇이 실제로 정의인지는 철학으로서만 알 수 있으며, 올바르고 진실하게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거나 국가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 신의 섭리에 따라 진정한 철학자가 되기 전에는 인류의 재앙은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실의에 차 아테네를 떠나 여러 곳을 여행하고 돌아온 플라톤은 40세경에 아카데미아라는 교육기관을 개설했다. 공자학당이 동양에서 학교의 효시였다면 아카데미아는 서양에서의 그것이었다. 그곳 정문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플라톤은 수학을 강조했다. 피타고라스의 영향이기도 하나 그는 수학적 방법론이 철학적 사유의 근간이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에 있어서 진리란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순수 이성적 사유의 힘으로 진리(결론)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수학적 방법론과 지극히 닮아 있었다. 이성과 진리(정의)의 강조, 그것이 바로 플라톤 철학의 요체였다.

아무리 정치와 손절 했다고 해도 지식인의 실천 욕망은 강력한 법이다. 그는 시라쿠사이(현재의 시칠리)에서 자신이 바라는 철인정치를 실현해 보고자 했다. 플라톤은 이미 젊은 날 시라쿠사이를 여행해 디오니소스 1세 참주정치의 잔혹상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60세와 66세 때의 방문은 명확히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새로 즉위한 디오니소스 2세는 외삼촌 디온과 함께 플라톤의 이상을 실현하고 싶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플라톤은 많은 고민 끝에 시라쿠사이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곳은 온갖 모함으로 가득 찬 궁전이었다. 디오니소스 2세 또한 듣는 귀를 가지지 못한 교만한 참주에 불과했다. 플라톤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그곳을 겨우 탈출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조언이라도 "스스로 바른길로 가고자 하는 의도가 없는 곳"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이며, 설령 그것은 자기 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라고 회고했다. 이 과정은 플라톤이 디온의 친족들에게 보낸 편지(「7번째 편지」)에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플라톤이 철학에 전념했던 것은 결과적으로 인류에게는 행운이었다. 플라톤은 80살로 사망할 때까지 많은 철학적 대화편을 남겼다. 철학사에 남긴 그의 족적은 무척이나 크다. 그래서 저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화이트헤드(Whitehead, 1861-1947)는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플라톤의 저작들이 지금까지 잘 전해지는 이유는 아마도 아카데미아가 서기 529년까지 유지되었으며, 그 이후에는 이슬람 학자들에 의해서 잘 보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자들의 승계 과정에서의 갈등 때문에 많은 저작이 초기에 유실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차이나 난다. 앞에서 설명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는 플라톤의 몇 개 묘비의 문구가 적혀져 있다. 그중 한 개를 적어보자. 참 멋진 비문이다.

절제와 정의로운 성격의, 죽는 자 가운데서도 뛰어난
신과도 같은 사람 아리스토클레스(플라톤), 여기에 잠들다.
만인 가운데 어느 누가 그 지혜로 크나큰 상을 받을만한 자가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가장 마땅한 자이며
더욱이 질투가 그에 따르지 않을지니.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삶(모두 기원전)>


469년 소크라테스 태어나다.
43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다.
427년경 플라톤 태어나다.
424년 델리온에서 아테네군이 패하다.
423년 소크라테스를 조롱하는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이 공연되다.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 스파르타가 지원하는 '30인 참주'가 아테네를 통치하다.
403년 '30인 참주'가 축출되고 아테네 민주정체가 부활하다.
399년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고 70살에 사형당하다.
387년경 플라톤이 아카데메이아를 창설하다.
347년 플라톤 80살에 죽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전체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
2. 소크라테스의 죽음
3. 플라톤의 이상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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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걸(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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