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役없는세상③] 차별과 불평등의 벽을 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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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役없는세상③] 차별과 불평등의 벽을 깨고
고정관념에 갇힌 성역할을 깨는 여성들
  • 2020.11.20 23:50
  • by 노윤정 기자

문재인 정부의 현직 여성 장관 6명(2020년 11월 현재), 여성 WTO 사무총장 후보 배출 등, 고위직에서 많은 여성이 등장하고, 여성가족부 2021년 예산안은, 전년 대비 5.3% 증액된 1조 1,789억 원이 편성되는 등 해마다 늘고 있다. 2018년 여성 창업자 지원에 100억 원이 배정되는 등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위한 정책들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여성들은 여전히 이런 변화를 체감하기 힘들고, 사회활동에 여전히 많은 한계를 느끼고 있다.
일부 남성들은 반대로 '역차별'을 주장한다. 여성들에 대한 지원책이 많아지면서 남성들이 손해를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남성 역시 '남성성'이란 이름으로 강요받는 성격, 역할이 있는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불만이다. 이런 대결적인 사회 분위기는 젠더 갈등을 불러온다. 최근 몇 년 사이 특정 사이트에서 남성과 여성의 대결 양상의 설전이 오가는 등, 남녀는 서로를 이해하기보다는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모든 이가 평등한 사회, 민주주의 국가가 된 지 70년이 넘어서고 있지만, 가부장적 성 역할은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고, 우리가 깨지 못한 편견은 결국 갈등이 된다. 라이프인은 고착된 성 역할이 젠더 갈등의 원인을 넘어 우리 사회의 혁신을 가로막는 요인 중 하나라고 보고, 이에 대한 대안을 실천하고 있는 사례들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최근 세계적인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에 흥미로운 연구가 발표됐다. 안데스 산맥에서 발견한 9,000년 된 여성의 유골을 연구한 내용이었는데, UC데이비스의 랜디 하스 교수를 비롯한 연구진은 20점 이상의 사냥도구(석기)와 함께 묻힌 이 인물을 높은 권위를 가진(a great chief) 사냥꾼으로 추정했다. 선사시대에 남성은 사냥을 하고 여성은 채집을 전담했을 것이라는 성역할론을 깨는 발견이다.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이 따로 있나'라고 말하는 시대라지만 여전히 우리는 특정 역할, 특정 직업, 특정 분야를 이야기할 때 특정 성별을 먼저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마치 '선사시대 사냥'이라는 말을 들으면 머릿속에 남성의 이미지가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성별에 따라 역할을 규정하고 강조하는 것은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발휘할 기회를 위축시킨다. 이와 같은 차별과 불평등의 벽이 존재하는 사회가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발전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이번 기사에서는 남성 중심적인, 남성의 이미지가 강한 영역에서 활동하며 성역할 고정관념을 깨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여성 공학자 수, 경력 높아질수록 줄어…자유롭게 원하는 미래 그릴 수 있어야"

▲ '그래프로 보는 2018년도 실태조사 결과 주요 내용' 갈무리.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 '그래프로 보는 2018년도 실태조사 결과 주요 내용' 갈무리.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매년 2월 11일은 '세계 여성 과학자의 날'이다. 지난 2015년 유엔이 과학기술계에서 여성들이 완전하고 동등한 기회와 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하고자 제정한 날이다. 이는 곧 과학기술계 여성들이 동등한 참여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실제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가 발표한 '2018년도 여성과학기술인력 활용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과학기술분야 연구개발 인력 신규 채용 중 여성 비율은 2009년 21.2%에서 2018년 28.9%로 증가했지만, 여성 보직자 비율(10%)과 여성 연구과제책임자 비율(10.9%)은 여전히 낮다. 특히, 경력 단계가 높아질수록 여성 비율이 줄어드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공계 대학의 전임교수 성비를 살펴봐도 여성 비율은 17.4%에 불과하다.

1946년 '대한전기통신학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된 대한전자공학회(1963년 개칭) 역시 설립 74주년이 된 올해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여성 회장이 선출됐다. 대한전자공학회 최초의 여성 회장인 임혜숙 이화여자대학교 전자전기공학전공 교수는 "아직도 공학계열 학회는 여성이 회장을 맡은 적이 없는 학회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으며 "공학을 전공한 20대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한 후 30대, 40대로 가면서 그 수가 급격하게 줄어든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또한 임 교수는 "연구소의 경우는 조금 상황이 나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공학 관련 산업체에는 극소수의 50대 여성만이 살아남았다는 통계를 볼 수 있다. 또한 공학을 전공하고 산업체에서 일하기 시작한 여성들의 경우에도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살아남기보다는 기획이나 인사부서 등 보다 여성들이 일하기에 적합하다고 알려진 업무로 이직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남성 중심적인 조직 문화가 여성들이 공학 분야에서 경력을 이어 나가는 데 필요한 인적 자원이나 정보 등을 지원받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직업 현장에서의 성차별은 재능 있는 인재들이 제 기량을 펼치는 것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차별을 유발하는 성역할 고정관념이 사라져야 한다. 아직 부족함이 있지만 우리 사회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성역할을 규정하는 데 문제의식을 느끼기 시작했고, 고착된 인식을 바꾸는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임 교수는 "젊은 세대에서는 성역할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육아휴직 제도를 이용하는 남성의 비율도 증가하고 있고, 함께 일하는 젊은 남성 교수들의 육아, 자녀교육, 집안일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보더라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다만 과학기술계는 다른 분야에 비해 인식 변화가 더디다고 지적하며 "여전히 국가연구기관의 연구원장이 여성인 경우는 매우 적고, 21대 국회에서는 특히 여성과학기술인을 찾아보기 어렵다. 공학 계열의 경우 여성 인재풀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한 데에도 원인이 있을 수 있다"고 부연했다.

인식 변화를 끌어내고 촉진하기 위해서는 여러 방면의 노력이 필요하다. 임 교수는 특히 "남성 중심의 조직에 여성들이 들어가 남성들과 협력하고, 다양한 시각과 새로운 시도들로 좋은 성과를 내는 경험을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남성들에게 많이 부여"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이 기존에 '남성의 영역'처럼 여겨지던 곳에서 남성과 함께 일하는 경험이 쌓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임 교수는 "여성의 비율이 일정 부분이 될 때까지 여성 비율 할당제 등의 정책이 필요한 이유가 이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례로 정부는 지난 2001년부터 과학기술분야 공공연구기관을 대상으로 신규 채용 인력 중 여성 과학기술인을 일정 비율 이상 채용하는 채용목표제를 도입해 추진해오고 있다. 

또한 임 교수는 "성에 따른 역할 부여가 아닌, 개인의 능력이나 희망에 따른 역할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발전에 필요조건"이라고 제언했다. 사회가 개인에게 자유로운 역할 선택의 기회가 열려 있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 '여성' 소방관 아니라 그냥 '소방관'

▲ 홍사현 소방사. ⓒ청주서부소방서
▲ 홍사현 소방사. ⓒ청주서부소방서

소방관은 '남성'의 이미지가 강한 대표적인 직업이다. 그만큼 여성의 비율이 낮다. 전체 소방공무원 중 여성의 비율은 단 9.7%(2019년 12월 기준)로, 중앙과 지자체에서 5천 명 조금 넘는 여성 소방공무원이 활약하고 있다. 그중 대형·특수소방차를 운전하는 여성 소방공무원은 총 48명으로, 아주 적은 숫자처럼 느껴지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증가한 수치다.

충북소방본부 청주서부소방서의 홍사현 소방사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소방사다리차를 운전하는 여성 소방공무원이다. 소방사다리차 운전은 소방관 직군에서도 험지(險地)로, 남성 소방관이 전유하다시피 해온 분야라고 한다.

홍 소방사는 "소방차를 운전하는 여성 소방관이 적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으나, 내가 '전국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게 될지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며 "한편으론 이러한 타이틀을 세상에 보인다는 것이 괜찮을까 걱정도 했다. 그저 한 명의 소방관으로서 할 일을 하는 것뿐이고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당연한 일일 수도 있을 텐데. 그러나 나에겐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으로, 책임감을 더해주는 좋은 타이틀일 수 있겠다고 여기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다리차 운전이 그동안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데는 우리의 내면 깊숙이 있는 '여성은 남성보다 운전이 미숙하다'는 편견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체력적인 부분을 미덥지 못하게 보는 시선도 있었을 터. '소방 업무는 체력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여성이 하기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인식은 여성 소방관이 감내해야 하는 대표적인 편견이다.

이와 관련하여 홍 소방사는 "맞다. 정말 대표적인 편견이다. 물론 체력적 한계는 극복하기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다"라면서도 "하지만 이것이 여성이 소방관으로 일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체력이 좋다고 모든 걸 혼자 할 수 있을까. 소방조직은 함께 진압하는 선후배, 동료가 있어야 가능하다. 현장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홍 소방사는 "소방공무원 조직 내에는 남성분들이 많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활동했던 선배들은 현재의 여성 소방관을 바라볼 때 어느 정도의 걱정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점점 여성 소방관이 늘어나고 있는 시대 변화에 발맞춰 많은 격려와 조언을 해준다"고 말했다. 느리지만 조직, 사회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를 수용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수학불안'(Mathematics Anxiety: MA)이라는 개념이 있다. 수학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압박감과 열등감, 과도한 긴장 등으로 인해 불안감을 느끼는 것을 이르며, 학생들의 수학교과 성취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하나다. 즉, '나는 못한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수행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규정된 성역할도 이와 같은 작용을 한다. 가부장적 인식에 기반한 성역할 규정은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을 제약하고, 성차별을 강화하고, 성 갈등을 유발한다. 이처럼 '여성은 이런 일에 어울리지 않아'라는 인식을 내재화시키는 사회는 여성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발전과 성장을 저해한다. 기존에 여성에게 금지(禁地)처럼 여겨졌던 영역에서 보이기 시작한 여성들은 관습적 억압, 잘못된 성 인식을 극복하고자 하는 하나하나의 노력이다. 여성, 그리고 남성에게 덧씌워진 편견을 벗어내기 위한 소중한 한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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